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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감정노동이라는 시한 폭탄
청진기 감정노동이라는 시한 폭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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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08.09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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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수(연세이비인후과 의원 의료윤리연구회장 )
▲ 홍성수(연세이비인후과 의원 의료윤리연구회장 )

얼마 전 은행에서 목격한 일이다. 내 바로 앞 순서의 60대로 보이는 여자가 거의 난동 수준으로 창구 여직원에게 입에 담지도 못 할 욕설을 퍼부으며 20분 가량 창구 업무가 마비되어 버렸다. 처음부터 상황을 지켜보던 나는 평소 알고 지내는 상급자에게 여직원은 아무 잘못도 없으니 도와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지만, 일이 더 커진다며 해당 직원에게 무조건 사과를 거듭 지시한다.

울면서 사과하는 그 여직원을 바라보며 내 병원의 직원들이 겹쳐지고 지난 20여 년 동안 겪은 악몽 같은 장면들이 '또 다시' 생생하게 떠오른다(비슷한 상황에서 나는 최대한 내 직원들 편을 들어주기 때문에 환자 불만 사항에 관한 한, 동네에서 평판이 그리 좋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어디 직원들뿐이랴, 원장이란 이유로 울지도, 화풀이도 못하면서 줄담배 몇 개비와 퇴근 후 술 한 잔으로 무작정 잊으려 애를 쓰고 켜켜이 쌓아두며 겨우 버텨왔을 뿐이다.

감정노동(emotional labor)이란 용어를 사회학에서 처음 사용한 이는 1983년 러셀 혹스차일드(Arlie Russell Hochschild)라고 한다.

'감정 관리를 통해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과 태도를 만들어내야 하 노동'이라 정의하고 감성 노동 즉, 업무와 관련된 바람직한 감정을 꾸며내는 세 가지 유형으로 첫째, 본인의 이미지와 생각과 사고방식을 변형시키는 것.

둘째, 신체적 반응을 변형시키는 것. 셋째, 표정과 태도를 변형시키는 것이라고 분류하였다.

보다 일반적인 정의는 '노동자가 자신의 감정을 자신의 업무에 맞게 변형시켜 이를 소비자들에게 상품으로서 판매하는 행위'라고 한다. 어쨌거나 자연스러운 감정마저 거래와 억압과 착취의 대상이 되었다는 인식의 변화를 반영한다.

감정노동자(emotional worker)라고 하면 여자 콜 센터 상담원, 백화점 직원 그리고 비행기 승무원을 제일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서구의 관련 서적에서 언급하는 직업으로는 간호사·의사·민원인을 응대해야 하는 공공 서비스 분야, 식당 웨이터가 최우선 순위이다.

그 차이는 '진상' 고객 횡포의 강도와 빈도가 아니라, 업무의 특성을 먼저 반영한 접근이란 생각이 든다. 사회적 합의에 의해 최상의 근무 여건(휴식 시간과 급여)을 제공하거나, 공익을 위한 자발적 헌신을 칭송하고, 두둑한 봉사료를 챙기는 관행이 자리 잡았을 것이다.

감정노동자와 고객 사이의 '거래'에서 노동자는 고객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 서비스에 만족하도록 해야 하는 과정에서 특정 고객이 무례한 행동을 해도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끝까지 친절한 미소로 환대해야 하는 스트레스 상황에 놓이게 된다.

'손님은 왕'이라고 확신하는 '진상' 고객이 감정노동자를 마치 마음대로 부리고 상처를 줘도 되는 노예나 하인처럼 대하여 감정노동자의 마음을 피폐하게 만든다. 감정 노동 분야에서 장기 근속자가 드물고 안타깝게도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로브와 피스크(Grove & Fisk)는 1989년에 "고객은 관객이고, 근로자는 배우이며, 근로환경은 무대이다(The customer is the audience, the employee is the actor, and the work setting is the stage)."라는 상징적인 정의를 내놓기도 하였다.

나 역시 의사(배우)가 진료실(무대)에서 환자를 본다는 일(공연)은 환자 및 환자 보호자(관객들)의 참여와 공감이 필수적인 '포괄적 행위 예술(Comprehensive Performance Art)'이라 생각해 왔다. 멋진 공연에 만족한 관객은 다시 그 무대를 찾을 것이다.

일반적인 가게(store)을 관찰하고 분석한, 새겨 볼 만한 해결책도 있다. 감정노동의 강도를 최소화하여 감정노동자의 업무효율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기준으로 '정신 없이 바쁜(busy)' 상황을 개선하여 '충분히 여유 있는(slow)' 여건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 명의 진상 고객으로 인한 심리적 압박을 정리할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감정노동자는 누적되는 압박으로 인해 언젠가 폭발할 수 있는 고장 난 시한폭탄과 같다. 감압을 해줘야 한다. 그 감정노동자 개인의 일로 끝나지 않고 그 피해가 누구에게로 어디까지 미칠 지 생각해 봐야 한다.

몰락한 동네 구멍가게, 음침한 이태원 짝퉁가게, 느리지만 불편한 재래 시장, 빠르고 획일적인 할인 마트, 주눅이 드는 고가 브랜드의 럭셔리 샵 등 각자 다른 규모와 분위기와 쓸모가 비교되면서, 동네 의원부터 상급종합병원까지 우리 의료 분야는 과연 어떤 규모와 역할의 정체성을 지켜가며 무슨 기능을 하고 있을까 생각해 본다.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서 겨우 돌아가는 시스템이라면 그 시스템은 너무나 취약하다.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희생을 당연하게 여긴다면 조만간 붕괴될 수 밖에 없다. 피해의식이란 당사자가 지속적으로 존중 받지 못 하며, 정신적-육체적-시간적-금전적 불이익을 당해 억울하다고 느낄 때 자리 잡는다.

환자들의 끝없는 욕구 불만과 의사들의 당장 못 해먹겠다는 아우성, 환자와 의사라는 당사자들의 문제일 뿐일까? 그 틈바구니에서 제도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정책 입안자들은 과연 몇 년 정도 미래를 내다 보고 있을까? 우리 사회가 합리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감당해야만 하는 지속가능성(reasonably affordable sustainability)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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