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을 위한 바른 소리, 의료를 위한 곧은 소리
updated. 2024-03-19 17:45 (화)
실향민과 고락 함께하며 희생·베품으로 갈무리
실향민과 고락 함께하며 희생·베품으로 갈무리
  • Doctorsnews admin@doctorsnews.co.kr
  • 승인 2014.03.18 11:24
  • 댓글 0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밴드
  • 카카오톡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3회 권경철 원장
▲ 제3회 권경철 원장

한국전쟁 당시 탈환한 수복지역으로 38선 이북에 위치한 강원도 화천은 주민 대부분이 실향민이었다.

1950년대 말까지만 해도 그곳은 전쟁의 잿더미 위에 허술한 판잣집들만 들어선 을씨년스러운 모습이었는데, 통일이 되면 가장 먼저 고향으로 달려갈 마음에 주민들이 안주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권경철 원장(권의원)은 이런 오지의 땅에서 30여 년 동안 실향민과 고락을 함께하며 인술을 펼쳤다.

1928년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난 권 원장 역시 북한에서 월남한 속칭 '삼팔따라지'였다. 그는 1958년 군의관으로 전역할 때까지 군병원인 화천 제2이동외과병원에서 외과의사로 복무하고 있었다. 당시 이곳에는 외과병원이 없었기 때문에 권 원장이 지역주민들의 수술까지도 담당해야 했다.

그런데 막상 제대를 하려니까 군 당국과 관계당국은 물론 주민들까지 나서 "외과의사를 구할 때까지만 있어 달라"고 호소해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권 원장은 많은 것을 희생해야 했다. 무엇보다 2남 3녀가 모두 서울 처가에서 자라면서 부모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한때는 마음이 흔들린 적도 없지 않았으나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의술을 베풀어야 한다"는 굳은 마음으로 이겨 나갔다.

한국전쟁 때 치열한 격전지였던 화천은 폭발물 사고와 같이 긴급한 수술이 많았다. 이런 환자들을 살리려면 춘천의 큰 병원까지 옮겨야 했는데, 비포장도로를 털털거리며 가다가 도중에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었기에 권 원장은 변변한 시설도 없이 많은 수술을 해야 했다.

사람의 생명에 대한 외경과 인술에 대한 사명감이 없었다면, 결코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서울의대 3회 졸업생인 권 원장이 처음 자리를 잡았을 무렵만 해도 행정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 지역에는 무자격 의사들이 날뛰었는데, 그들은 권 원장을 두고 "서울의대 나온 사람이 이런 데서 개원할 리 없다"며 악소문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권 원장은 "의사의 직분은 병을 고치는 것"이라는 상식적인 믿음 하나로 묵묵히 한 길을 걸었다.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