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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낮 없이 험한 시골길 누빈 '천생 의사'

밤낮 없이 험한 시골길 누빈 '천생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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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03.18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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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김진경 원장

▲ 제5회 김진경 원장

1943년 태평양전쟁의 패색이 짙어지자 일본 제국주의는 대단위 관광단지를 개발한다는 미명 아래 백제의 도읍 부여에 신궁 건립을 서둘렀다. 이 때 부여에 폭 25m의 거리가 조성되는 등 개발붐이 이는 듯했으나, 해방과 함께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제5회 보령의료봉사상 수상자인 부여의원 김진경 원장이 이곳에 정착하게 된 동기는 이러한 개발붐 때문이었다. 관광도시 경주처럼 장차 신흥도시로 번성할 조짐이 보였기 때문이다.

1911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1937년 평양의전을 졸업한 김 원장은 이때부터 오로지 부여에서만 50년 넘게 환자를 돌봤다.

그러다보니 지역주민 중에 그를 타관 사람으로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의사라는 직업을 천직으로 여기고 그곳 사람들에게 묵묵히 인술을 베풀어가면서 '진짜' 부여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김 원장이 정착할 무렵만 해도 부여는 지금과 달리 아주 낙후한 시골에 불과했다. 의료기관이라고는 일본인이 경영하던 의원 하나가 고작이었다.

김 원장은 주변에 인가도 하나 없는 허허벌판 농경지에다 헐린 경찰서의 재목을 불하받아 70평 규모의 건물을 신축했는데, 그 건물이 바로 반세기 동안 부여의 주민건강을 지켜준 인술의 산실이됐다.

해방이 되자 김 원장이 군내의 유일한 의사가 됐다. 주민들이 시도 때도 없이 두드려대는 대문 소리에 잠자다 일어나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험한 시골길을 누비며 왕진도 다녀야 했다. 김 원장은 환자가 있는 곳이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갔다.

 

물론 치료비는 대부분 외상이기 십상이었고, 나중이라도 갚으면 다행이었다. 그래도 퇴원했던 환자가 닭이나 달걀꾸러미를 들고 찾아와 고마움을 표시할 때면 뿌듯한 보람과 함께 쌓였던 피로가 싹 가시더라니, 김 원장은 천생 의사였다.

1987년 부여 지방이 수해로 물바다가 됐을 때는 수해복구와 대민진료에 앞장서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원근을 마다않고 수재민을 찾아다니고 보살피면서 주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부여의원을 49년간 지키면서 이웃과 고락을 함께 나누며 '원장할아버지'로 통했던 김 원장은 1996년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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