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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튼 발 빈손이라도 이웃 앞세운 무소유 삶
부르튼 발 빈손이라도 이웃 앞세운 무소유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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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03.18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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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강명흡 원장
▲ 제8회 강명흡 원장

강명흡 원장(경기 포천·강의원)은 '계류리의 기둥'으로 불렸다. 작고 조용한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계류리에서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처음 자신이 치료했던 사람의 자식들, 또 그 자식들의 자식들까지' 치료해오면서 선사받은 별칭이다.

1923년 함경북도 청진 출신으로 한국전쟁 때 월남한 강 원장이 1954년 개원할 때만 해도 이 지역은 무의촌으로 주민들은 전쟁 끝에 빈곤한 삶을 이어갔다. 그는 당시 인터뷰에서 "내 고향도 아닌 이곳에 끌렸던 것이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하루하루 지낼수록 이웃들의 인정에 젖어 들었고, 또 그곳에서 교사로 있던 아내를 만나 결혼하면서 눌러앉게 됐다.

초창기에 의사라고는 강 원장밖에 없었기 때문에 하루 해가 모자랄 지경이었다. 하루에도 수없이 청해오는 왕진 때문에 발이 부르틀 지경이었다. 그나마 치료를 해주고 돌아오는 길은 빈손일 경우가 다반사였다. 강 원장이 이곳을 떠날 생각을 안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오히려 험한 산길을 누비면 누빌수록 떠나고 싶은 마음보다 남아야 한다는 사명감이 더욱 커져갔다.

강 원장은 개원과 함께 뚜렷한 목표를 세웠다. '하루에 두 명씩 무료 진료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목표했던 두 명이 서너 명을 넘어가기가 일쑤였다.

1972년까지 강 원장에게 땅 한 평, 집 한 채 없는 것이 어쩌면 당연했다. 돈이 생기는 대로 자신보다 남을 도와주며 살았기 때문이다. 강 원장의 이런 삶은 마을사람들로부터 보답을 받기도 했다.

주민들이 보은의 뜻으로 모금을 해서 114평의 땅을 희사하고, 그 곳에 직접 벽돌을 찍어 의원 건물을 지은 다음 등기까지 해준 것이다.

강 원장 역시 지역주민들로부터 받은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 1983년부터 장학사업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공의로 있으면서 받은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저축한 1700만원과 사재를 더해 4000평의 땅을 마련하고 그 땅에서 수확되는 수익금 전액을 장학금으로 지급하기 시작했다.

8년 동안 250여 명의 각급 학생들에게 장학금 혜택이 돌아갔다. 보령의료봉사상 상금으로 받은 500만원 역시 모두 장학기금으로 쓰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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