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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역경 이겨내고 희생의 삶 이어간 선비
수많은 역경 이겨내고 희생의 삶 이어간 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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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03.18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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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오병천 원장
▲ 제9회 오병천 원장

오병천 원장(충남 보령·성도의원)은 1913년 평범한 중농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때부터 정규 의대를 거치지 않고도 의사가 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스무 살 때 집을 나와 한약방과 한의원·의원을 전전하며 의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했고, 마침내 1943년 5월 전라북도에서 한지의사(限地醫師) 시험에 합격했다.

한지의사는 일정 지역에서만 개원할 수 있었으나, 오 원장에게는 새로운 길이었다. 해방 때까지 공의로 근무하던 오 원장은 1945년 미군정청이 시행한 의사검정시험에서도 17: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해 한지의사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었다.

1946년부터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까지 충남 보령군 미산면에서 삼세의원을 운영하던 오 원장은 그 후 고향 웅천으로 잠시 의원을 옮긴 뒤 얼마 안돼 보령군보건소장이 됐다.

그러나 가정적으로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10년 만에 보건소 일을 그만두고 1966년 대천읍에서 제중의원을 15년간 개원하다가, 1982년 고향으로 자리를 옮겨 성도의원을 개원하기에 이른다.

오 원장은 반백년 가까이 의사 생활을 하면서 가장 열정적으로 일했던 때로 대천에서 개원한 15년 동안을 꼽았다. 군내 주변 면소재지며 산간 오지 등 안 가본 곳이 없었다. 다급한 맹장수술이나 소파수술을 비롯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수술을 해야 했다. 성도의원을 열고 얼마 후부터는 노인들을 위해 무료 진료를 시작했다.

 

오 원장은 당시 인터뷰에서 "의사가 돈 맛을 알면 안 된다"고 말했다. 자녀들 학비 때문에 보건소장을 그만두고 개원을 한 것이 평생 동안의 부끄러움으로 남았다는 솔직한 고백도 남겼다.

'검정의사'를 꿈 꿀만큼 영특했던 오 원장은 어려서부터 선친과 서당의 가르침을 통해 <논어> <맹자> 등 한학을 공부하며 공맹의 도를 체득한 선비였다. 서예가로도 명성이 높았고 서예전 수익금으로 어린이 가장을 도왔던 오 원장은 1998년 별세했다.

그가 평소 즐기던 글귀는 '단사호장 재누항 낙재기중(簞食壺漿 在陋巷 樂在其中·밥 한 그릇에 물 한 사발 마시며 누추한 곳에 살아도 즐거움이 그 안에 있구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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