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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사람 남을 때까지…마지막 탄광촌 지기
단 한 사람 남을 때까지…마지막 탄광촌 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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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03.18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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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방덕환 원장
▲ 제11회 방덕환 원장

"단 한 명의 주민이 남는다고 해도 그날까지 머물겠다."

방덕환 원장(강원 정선·고한성심병원)이 1995년 제11회 보령의료봉사상을 받았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고한읍은 아스팔트길 하나 없이 완행 기차만 간신히 들어올 정도의 산간벽지였다. 몸뚱이 하나 믿고 돈 벌어보겠다는 고달픈 사람들만 모여들 뿐, 자원해서 찾아오는 전문 인력은 거의 없었다. 방 원장 역시 처음에는 무슨 거창한 사명의식 때문에 탄광촌으로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1934년 서울에서 태어나 1959년 서울의대를 졸업한 방 원장은 곧바로 해군 군의관으로 임관됐다. 복무기간 중 미국에서 1년간 수련을 받았고 부산의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정형외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고 1970년 예편과 함께 서울에서 정형외과의원을 열고 5년간 운영했다.

그러나 개원 생활에 갑갑증을 느끼던 그는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1976년 정부 파견 아프리카 의료사절단에 들어가 4년간 가봉과 자이르에서 의료봉사를 펼쳤다.

아프리카에서 귀국한 방 원장은 별다른 계획 없이 정선군 사북읍 동원보건원으로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정형외과 의사가 없어 쩔쩔매는 친구와 환자들을 보기 민망해 잠시 돌봐준다고 한 것이 결국 발목이 잡혀 5년간 머물면서 원장까지 지내게 됐다.

 

탄광촌은 그 어감만큼이나 거칠고 험한 곳이었다. 혹시 사고라도 일어나면 그 피해가 극심했다. 석탄 실은 광차 바퀴 밑에 깔려 다리를 절단할 수밖에 없었던 환자가 있었고, 그 가족이 찾아와 다리 절단을 항의하며 돈을 뜯어내려 했던 일도 겪었다.

그러다가 1986년 사북읍에서 풀려나서는 서울에 있던 땅을 처분해 고한읍에 성심의원을 짓고 광부들을 계속 돌볼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다. 그런데 개원 이듬해부터 탄광촌 경기가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하면서 의원 경영이 갈수록 어렵게 됐다.

마을은 폐광촌으로 변해갔지만 진폐증을 앓는 환자들이 늘어나자 수십 명이 입원할 수 있게 병원을 고치면서까지 고한을 지킨 방 원장에게 주민들은 '고한읍의 슈바이처'라고 칭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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