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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24-04-23 17:54 (화)
예기치 못한 사고에 두려움 앞섰지만…"나는 의사다"

예기치 못한 사고에 두려움 앞섰지만…"나는 의사다"

  • Doctorsnews admin@doctorsnews.co.kr
  • 승인 2013.12.02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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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품고 뭍으로 돌아오다'
박수현의 선박의사 체험기 ④

 
"선생님 학생 한 명이 많이 아파요."

서둘러 올라가보니 키가 크고 얼굴이 하얀 아이 한 명이 침대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누워 있었다. 열을 재보니 39.2도. 갑자기 고열이 나니 감염 소견으로 보여져 병력 청취를 시작했다. 정신 없이 횡설수설하는 아이에게 일단 정맥라인을 잡아놓고 수액을 연결했다. 서너시간 동안 설사를 10회 이상 했고, 복통이 있는 것으로 봐서는 장염 같다.

위생 상태가 열악한데다가 너무 더웠던 미얀마에서 학생들이 길거리음식과 생과일 주스·얼음 등을 많이 먹어서 그런 듯 싶었다. 그렇게 경고를 했는데도 첫 기항지였던 태국에서 한 가이드가 이곳은 더운 국가여서 대기중 자외선량이 많아 길거리 음식을 먹어도 탈이 나지 않는다는 말을 믿었던 것이다.

아마도 왕성한 식욕에 호기심 풍부한 그들의 세계에서는 아주 반가운 합리화였을 것. 결국 나의 경고를 무시하고 길거리 음식들을 잔뜩 먹었다니 속이 터졌다. 미얀마를 출항한 후 2∼3일째이니 잠복기를 고려하면 아마도 그 때 얻은 세균성 장염인듯 싶었다.

대충 환자들을 보며 알아보니, 일반 장염 증상에 쓰는 약만 사용해서는 효과가 없었고, 병원 처방 지사제라며 의사 진찰 없이 로프민 계열의 약을 먹은 사람들은 복통과 열이 더 심해졌다.

얼음을 얼려 양쪽 겨드랑이에 끼워놓고, 계속 거즈에 물을 적셔 이마와 목을 닦아줬다. 그 아이 옆에서 새벽녘까지 열이 떨어지길 기다리며 시간에 맞춰 해열제를 먹이니 마음이 짠했다. 다행히도 그는 해열제와 장 진경제, 그리고 항생제를 쓰면서 증상이 조금씩 호전됐다. 그러나 문제는 그 때부터였다.

무섭게 번져 나간 장염

장염 환자가 점점 늘어 나기 시작하더니 결국 정점을 친 날은 하루에 15명까지 이르기도 했다.

전체인원의 10%가 넘는 숫자이다. 단체급식에 단체생활을 하는데다가 밀폐된 환경이 아무리 위생관리를 잘해도 열악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급속히 퍼진 것이다. 항생제에 내성이 생길 수 있어 장염일 때 일반적으로는 무조건 항생제를 쓰지 않지만 이렇게 빠른 전염력이 있을 경우 약제 사용은 불가피했다.

환자 수가 줄기 시작하고 회복기로 들어서며 겨우 잡히기 시작했다. 내성균을 최소화하기 위해 항생제 일수를 맞춰 복약교육을 철저히 했다. 항생제의 종류뿐 아니라 가지고 있는 약제의 양도 한정돼 있기 때문에 복약교육은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며칠간 수액을 맞은 학생과 승무원이 7명. 총 장염환자 수는 48명 전체의 삼분의 일에 가까운 무서운 수치였다. 다행히 다들 건강하고 젊은 친구들이라 금세 나아서는 다시 신나게 뛰어다니니 마음이 놓이면서 그 회복력에 마냥 고맙고 행복했다.

죽을 거 같은 표정을 짓고 왔다가 좀 호전이 되니 금식 내지는 부드러운 죽 위주로 먹으라는 걸 참지 못하고 너무 배가 고프다며 야식까지 잔뜩 먹고 다시 탈이 나서 온 학생들에게 여우 눈을 뜨고 흘겨보며 혼도 내고 의료환경이 좀 떨어지는 국가 병원에 입원시켜버릴 거라는 말도 안 되는 협박도 해줬지만 그들이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웠는지 모른다.

얼굴과 이름은 매치가 잘 안 될 때도 얼굴을 보면 이 아이가 뭐에 알러지가 있는지, 어떤 병력이 있는지가 떠오르는 거 보면 직업병인가도 싶고 잘 나아준 아이들을 보면 뿌듯하고 좋은 거 보면 팀닥터가 어울리는 가도 싶었다.

그렇게 전염되던 급성 장염도 다 가라앉고 다시 편안한 배의 일상이 찾아왔다.
미얀마.

개인적으로 미얀마는 2008년 의료봉사를 다녀온 이후 두 번째다. 2008년 기준 WHO에 의하면 미얀마의 평균수명은 54세이며, 15세 이상 성인 사망률은 1000명 중 336명이고, 5세 이하 영유아 사망률은 1000명 중 122명이라고 한다. 그 때 본 환자들은 심지어 병과 정상적인 신체현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를 테면 "TV를 7시간 내내 봤더니 눈이 너무 아파요." "아기 잘 생기게 하려면 보름달이 뜬 날에 해야하나요?"라는 질문과 상담….

▲ 피범벅이 된 승무원을 치료한 후 성당을 찾아 기도했다. 그의 쾌유를 빌며 사람을 고치는 능력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오만인지, 사람의 몸에 손 댈 수 있는 그 허가가 얼마나 무겁고 두려운 것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첫 기항지였던 방콕항구에 환영 현수막이 걸렸다.

아이 생기려면 보름달 뜬 날에?

심지어 현지 의대생 친구와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데 의사면허 실기시험에서 어찌됐든 아기를 울리면 실격이라고 한다. 아기는 전체적인 신체검사가 중요하고, 진찰 때 특히 목부위를 볼 땐 대부분 우는데도 말이다.

무조건 안 울게 해야 한다는 팁을 주어서 같이 웃었던 기억이 있다. 실은 이러한 의료 사정을 뻔히 알고 있기에 제발 미얀마에서는 아무일 없기를 간절히 바랐다. 원래 간절한 바람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미얀마 정박 첫날.

갑판부의 회식이 있는 날이었다. 오랜 항해 끝에 정박이고 보니 조금씩 긴장이 풀린 상태였을까. 환자가 발생했다. 그 때 난 상륙을 다녀와서 곳곳의 먼지를 닦아내기 위해 좀 여유 있게 씻기 시작했다. 그 순간 밤 12시가 넘었는데 욕실 밖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린다.

대충 수건으로 몸을 닦고 나오려고 하는데, 누군가 문이 부서질 듯 두드린다. 나는 머리에 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대충 편한 옷을 걸치고 문을 열었는데, 당직사관들의 얼굴이 사색이 돼 있다. 그리고 뒤엔 30대 후반 정도의 승무원 한 사람이 바지전체에 피범벅을 해서는 만취상태로 서 있다.

술을 먹고 깨진 유리컵에 주저 앉았다고 한다. 자세한 상황을 물어봐도 같이 있던 사람도 말을 얼버무린다. 회식중에 다칠 경우 나중에 책임을 물을 수도 있는 일이니 다들 조심스러웠던 모양이다. 계속 상황을 물어보는 내게 어딜 다쳤는지는 의사가 알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한다.

다들 놀랐고 피를 봐서 그런지 당황하고 예민해져 있다. 기다리며 밖에서도 티격태격한 모양이다.

나는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내가 살펴볼 테니 걱정 말고, 감정을 가라앉히고 기다리라고 말했다. 나 역시 속으로는 매우 당황하고 무서웠으나, 이런 상황에서 내가 당황하는 기색을 드러내서는 좋을 게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만취상태인 환자에게 병력청취와 상황에 대한 질문을 하다 중지하고, 일단 가위로 바지를 잘라 냈다. 바지와 속옷은 물론이고 양말과 신발까지도 모두 피범벅이다. 식염수와 알코올을 이용해 닦아본다.

왼쪽 무릎 뒤에 큰 피멍이 있는 것으로 봐서는 그 쪽을 부딪히고 균형을 잃으면서 넘어져 유리잔 위에 앉은 모양이다. 오른쪽 엉덩이 밑 쪽으로 세모 모양의 5cm정도 되는 deep laceration이 있다.

승선때 열악한 진료실과 소독기구가 갖춰지지 않은 것에 대해 불평하자, 이제껏 배 안에서 큰 사고가 난 적 없다고 했었는데…. 역시 '나는 환자를 탄다'고 생각하며 최대한 멸균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해 본다. 일단 배에 오르자마자 소독약으로 니들 홀더·가위·핀셋을 닦아 유브이 쬐는 기계(작은 식기건조기 같이 생긴 것)안에 넣어 두었던 것이 생각났다.

이런 상황이라면 유리가 박힌 여부도 알 수 없고, 멸균이 보장 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현지 병원에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현지 병원 상황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상처가 생각보다 깊이도 깊고, 다른 구조물 손상도 우려됐다.

더군다나 유리가 몸 속 어딘가에 박혀 있을 지도 모르는데, 환자는 만취상태라 통증의 여부를 묻는 것 조차 불가능했다. 가진 실린지 중 가장 큰 실린지에 식염수를 넣고 압력을 줘 씻어내기를 반복했다. 빈 식염수 통이 쌓이고 나자 봉합을 시도했다. vertical로 4땀을 따고 simple sutre로 5땀 정도 suture를 했다.

margin이 일정하지도 않고, 3갈래로 찢어져 있던 터였고, 의료관리자인 3항사도 회식에서 돌아오지 않아 보조하고 자세를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항생제 IM을 놔주고, 경구 항생제를 처방했다. 날이 밝는 대로 환자가 술 깨고 나면 다시 진찰하기로 하고 돌려보냈다.

가장 무섭게 느껴진 손으로…

2시간 정도 소요된 거 같은데, 다 끝나고 나니 진료실이 난장판이다. 순간순간 의사는 결정해야 하는 중심에 놓일 때가 많다. 현지 병원에 갈 것인지, 여기서 할 것인지, 한다면 어떤 계획으로 할 것인지, 이러한 의사결정은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 모르기 때문에 조심스럽지만 신속해야 한다.

열악한 진료실에서의 처치를 선택한 것은 정박 첫날 다쳤기 때문에 2~3일 더 지켜보다 현지 병원에 갈 수가 있다는 시간적 옵션이 있었고, 어차피 다음 기항지가 싱가포르이므로 그 때까지 버텨보자는 판단에서였다.

주사위는 내 손을 떠났다. 나는 다음날 성당에 가서 기도를 했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사람을 고치는 능력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오만인지에 대해 말이다. 사람의 몸에 손 댈 수 있는 그 허가가 얼마나 무겁고 두려운 것인지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봤다.

사실 의연한 거 같았던 그날, 나는 살면서 가장 무겁게 느껴지는 손을 들고, 그 손을 사람의 몸에 대며 나는 몇 번이고 괜찮게 해달라고, 그가 하루빨리 치유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기도가 통한 걸까. 이물질이 남아 있는 소견도 관찰되지 않았다.

상처도 처치 이틀 후 두 군데 정도 margin을 깨끗이 잘라내고 재 suture를 했지만 특별한 감염 소견 없이 이후에도 현지 병원을 거치지 않고 완쾌됐다.

의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되찾고 싶어서 시작한 항해였다. 어떤 의사가 되어야 하는 걸까에 대해서는 여전히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지만 점점 의사가 되고 싶었던 그 초심이 다시금 강하게 꿈틀대며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렇게 항해는 계속됐고, 샤워기에 머리가 찢어진 아이, 혈변이 있는 아이, 불면증에 시달리는 아이 등 다양한 환자는 계속 나를 찾아 왔다. 그리고 의사로서의 내 마음은 더욱 굳게 다져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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