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진료한다는 것
'의사가 환자를 본다'가 의사라는 직업의 제1 직무항목인 것은 동서고금을 통해 동일할 것이다. 어떤 의사가 현재 연구나 교육 혹은 정치나 기타 사회 활동에 전념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의사' 타이틀은 '환자를 보는 것'을 고유한 배경역량으로 간주한다.
이는 어느 국가에서건 의과대학에서 그렇게 교육과 훈련을 받고 있으며, 이를 근거로 졸업 자격과 의사면허증을 부여하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합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의사가 환자를 본다'에서 '본다'에 대한 해석이 시대적으로 사회적으로 당사자별로 혹은 학술적으로 적게 혹은 크게 다르다. 즉 '진료'·'치료'·'치유'·'돌봄'·'관리' 등의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므로 이에 대한 공감대를 만들 필요가 있는 것이다.
어찌 됐건 우리보다 훨씬 일찍 의사의 역할이나 직무 규범을 공표하고 활용하고 있는 나라들도 'good clinical care, good medical practice'(영국), 'patient care'(미국), 'medical expert'(캐나다) 등의 표현으로 '환자를 보는' 역량의 범주를 정하고 있다.
'한국의 의사상 설정' 연구의 의사역할 혹은 역량 규정에서도 '환자를 보는 것'을 제1 범주로 하는 것에는 이견이 없었다. 또한 환자의 증상이나 문제를 듣고 진단하여 치료를 하는 의사의 전통적인 행위의 집약용어인 '진료'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러한 '진료' 역량 규정에 지식·술기·태도의 3개 요소가 모두 포함했다.
핵심 키워드들은 ▲전문적인 의학지식 ▲임상 술기 능력 ▲적절한 의학적 판단 ▲근거-중심, 윤리-바탕과 효율적인 의사소통이 동반된 치료 결정 ▲환자 안전 ▲평생 전문직업성 개발과 유지 등이다.
이러한 키워드를 바탕으로 '한국의 의사상'의 '환자 진료' 역량은 다시 '지식과 술기'·'태도'·'환자 안전'의 3 개 역량군으로 나눴으며, 각각의 역량군 제목 하에 구체적인 세부역량들을 열거했다.
환자의 안전에 관련된 의사 역량을 하나의 역량군으로 구분한 이유는 의료에서 '환자 안전 우선'의 세계적인 추세를 반영한 것이다. 영국의 의사직무규범 2013년 개정판에서도 이전의 의사역량 항목을 대폭 재구성하면서 4개의 큰 범주 중 두 번째를 환자안전으로 설정했다.
'지식·술기'에서는 전문적인 의학 지식과 술기를 갖추고 진단·치료 등에 이르는 일상적인 진료 행위에서 근거·효과성·개별성 등을 고려해야 하며, 그외 환자동의·의무기록·환자의 통증에 관한 의사의 역할을 덧붙였다.
'전문가적 태도'에서는 환자와의 신뢰구축이나 평생 전문직업성 개발에 노력할 것 외에 진료결정에서의 환자의 역할·현대 의료의 한계 인식·의료인 상호 의뢰·직무 윤리 등에 관해 기술했다.
'환자안전'에 있어서는 진료과정에서의 환자안전 확보를 위해 노력하는 것 외에 약물 사용·위해 상황 발생 시 대처 등에 관한 역량들을 포함했다.
'환자 진료' 범주 안의 세부 역량들 가운데에는 '의사소통과 협력' 이나 '전문직업성' 등 다른 범주의 세부 역량과 그 의미상 중복되는 항목들이 몇몇 있다.
하지만 '한국의 의사상 설정'은 법률이나 규정이기 보다는 지침이나 선언적인 의의가 더 있으므로 중요한 내용은 그 역량을 지칭하는 방향에 따라 변형된 표현으로 다른 범주에서도 반복해서 강조할 수 있다고 봤다.
이번 연구에서 지적된 사항 중에는 "현재 한국의 의료 환경에서 의사에게만 부여되는 역할들이 타당한 것이냐?"하는 점과 현대 의료 상황의 복잡성을 고려할 때 전통적인 개인 역량만을 강조하는 것보다 의사가 속해 있는 조직이나 기관, 혹은 다른 직종이나 사회에 대해서도 이러한 역량에 부합하는 변화가 동반돼야 한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시대 변화에 적극적이고 선도적으로 반응하도록 하는 의사 개개인의 역할과 역량의 설정 작업은 의사라는 전문직의 가치를 집단 내적으로 고양하며, 시대정신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고귀함이 있다. 따라서 예로부터 세계 어디에서나 의사들은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영국은 1963년 의사들의 직무에 관한 소개 및 규정 들을 만들기 시작해 활용하다가 1995년 'Good Medical Practice(GMP)'라는 영국의사직무규범을 만들어 공표했다.
이 문서는 의사의 역할 규범에 대한 원조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많은 나라가 이를 원용해 자신의 환경에 맞는 의사의 역할을 만들기 시작했고, 이를 자신들의 'GMP'라고 부르기도 하기 때문이다.
2006년 3차 영국 GMP 개정판에는 의사의 역할 규정 첫 문장이 다음과 같이 시작되는데 이는 2013년 4차 개정판에도 동일하다.
"환자는 좋은 의사를 필요로 한다(Patients need good doctor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