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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눈의 배현정 원장 "마약달라" 소리치니...

파란 눈의 배현정 원장 "마약달라" 소리치니...

  • 정리=최승원 기자 choisw@doctorsnews.co.kr
  • 승인 2013.08.19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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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낙 가천대 명예총장이 만난 '성천상' 수상자 배현정 원장

이성낙 성천상위원회 위원장(가천의대 명예총장 왼쪽)이 성천상 1회 수상자인 배현정 전진상 원장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 ⓒ의협신문 김선경 기자

마리 헬렌 브라쇠르. 마리는 26살 되던 1972년 10월 6일 밤 10시 30분 혈혈단신으로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41년이 지난 지금도 그 순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70년대 초반 김포공항은 어수선했다.

아직 공사 중인 건물들이 텐트를 친 것 마냥 방수포를 뒤집어 쓰고 있었고 본청 건물은 국제공항이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작았다. 마중나온 한국측 사람들은 만나자마자 인사를 생략하고 부랴부랴 택시를 잡았다. 마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녀는 택시에 던져졌다.

유신정권의 통행금지가 유효하던 시절. 두 시간이나 연착하는 바람에 자칫 발이 묶일 수 있다는 우려에서 였다. 아직도 마리는 한국에 도착해 처음 들은 '빨리 빨리'라는 한국말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명동에 도착해 비로소 내린 서울 밤거리는 어둡고 무서웠다. 통행금지가 풀리는 새벽 4시만 되면 적막하던 아침이 한순간에 소란스러워지는 것도 신기한 경험이었다. 통행금지 시간인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의 고요함은 참 좋았다.

간호사였던 마리는 이후 한국명 '배현정'이 됐고 중앙의대를 졸업하고 가정의학과 전문의가 됐다. 서울 시흥동 판자촌에 터를 잡고 가난한 이웃과 함께 그렇게 41년이 흘렀다.

파란눈의 의사 배현정 전진상의원(천주교 유지재단) 원장(67)이 최근 JW중외제약이 제정한 '성천상' 첫 수상자로 선정됐다. 배 원장은 모국인 벨기에를 떠나 1972년부터 한국에 정착해 41년 동안 가난한 이웃을 위해 헌신해 왔다.

'성천상위원회' 이성낙 위원장(가천대 명예총장)은 8일 배현정 원장을 만나 성천상 첫 수상자가 된 배 원장의 41년간의 자취를 되돌아보고 성천상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다.

JW중외제약은 창업주인 고 성천 이기석 사장이 실천했던 '생명존중'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올해 성천상을 제정하고 첫 수상자로 배 원장을 선정했다. 시상식은 28일 서울 웨스틴조선호텔 오키드룸에서 개최된다.

이성낙 위원장(이): 1970년대 초반 벨기에에 한국은 미지의 나라였다. 한국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나?

배현정 원장(배): 20대때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무조건 가서 봉사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당시에는 남미쪽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때 국제가톨릭형제회 회원 중 한국인 한분이 한국으로 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래서 OK했다. 한국이 나를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선택권이 있었으니 남미로 갈 수도 있지 않았나?

배: 남미는 부르질 않더라...

다같이: 하하하

배: 물론 가족들은 걱정 많이 했다. 당시 벨기에 사람들은 한국에 대해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동양인하면 중국인이나 일본인을 떠올렸다.

나 역시 걱정이 됐다. 당장 한국어는 라틴계 언어가 아니라 처음부터 배워야 한다는 것도 부담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한국을 선택한 것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일본을 가끔 방문하기도 하는데 일본 사람들은 얌전하고 예의바르지만 감정표현이 솔직한 한국이 더 나하고 맞다.

이: 그 말은 배 원장은 얌전하지 않다는 말로…

다같이: 하하하

배: 난 얌전하지 않다. 농담하는 것 좋아한다. 만약 일본에 갔더라면… 어휴~. 한국이 좋다. 우리(국제가톨릭형제회)는 그 나라를 가면 철저히 그 나라 사람이 돼야 한다는 원칙이 있다. 1972년 10월 6일부터 마리가 아닌 배현정으로 살아왔다.

41년간 한국에서 살면서 한국의 엄청난 발전상을 목격할 수 있었고 한국인 특유의 열정과 에너지, 희망을 봤다. 한국에 온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보낸 41년은 행복한 시간이었다.

이: 시흥동에 정착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정착과정에서 고생도 많이 했을 것 같다

배: 고 김수환 추기경의 부탁도 있었고 내 생각에도 봉사하기 적당한 곳이라고 여겼다. 당시 시흥동은 인구유입이 활발한 지역이었다. 트럭에 가족들과 간단한 가재도구를 실고 와서 빈터에 대강대강 판자집 짓고 정착하는 광경을 매일 봤다.

그러다보니 상하수도 시설이니 위생적인 환경같은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아이들이 홍역으로도 죽었다. 정말 엄청나게 비위생적인 환경이었다.

우리도 7년 동안 수돗물없이 살았다. 보건소에서 일주일에 두세번 물을 받아 먹었고 그것도 없으면 샘물을 길어다 먹었다. 지금 젊은 한국사람들은 아마 상상도 못할 거다. 화장실도 공동화장실인데 '푸세식'이었다. 집집마다 열쇠를 받아다 썼는데 급해서 가면 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 ⓒ의협신문 김선경 기자

이: 벨기에에서는 상상도 못해봤던 화장실일텐데…

배: 정말 화장실 에피소드는 하루종일 얘기할 수 있다.

이: 정착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으로 본다. 익숙하지 않은 환경과 유럽과는 다른 덥고 습한 한국 8월 날씨 등. 무엇이 가장 어려웠나?

배: 한국의 8월 날씨나 푸세식 화장실은 문제될 것 없었다. 적응하면 될 일이고 그리고 재미있었다. 하지만 인구 4만명이 살고 있는 시흥동에 이렇다할 보건의료시스템이 부재하다는 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었다. 당시 시흥동에는 보건소도 멀리 떨어져 있었고 119시스템이 닿는 곳도 아니었다.

우리 역시 돈이 없어 차도 없었다. 한동안 쌀이 떨어진 적도 있었다. 정말 한마디로 응급환자가 발생해도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그런 상황이 너무 공포스러웠다. 정말 그때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만큼만 닥치는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지금은 그런 상황이 많이 개선되지 않았나?

배: 판자촌이 없어졌다고 가난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판자촌이 있을 때는 그래도 가난이 눈에 보였다. 하지만 판자촌이 헐리고 판자촌에 살던 어려운 사람들이 반지하 쪽방으로 내몰리며 그나마 가난이 보이지도 않게 됐다.

쪽방에서 만성질환을 앓고 있는 이웃들을 왕진간다. 왕진가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불을 켜는 것이다. 반지하는 하루종일 어둠이다. 그래도 그 분들한테 전기료는 너무 비싸다. 그러다 보니 하루종일 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그렇게 견딘다.

대부분이 독거노인들이다. 가족들이 있지만 모두 이름만 가족인 상황이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버려지는 아이들이 많았다. 이제는 버려지는 노인들이 너무 많다. 하루하루를 버티다 자살을 생각하고 다시 고쳐먹고 하루를 또 겨우 넘기는 사람들이다. 너무 안타깝다.

이: 배 원장을 성천상 수상자로 선정한 가장 큰 이유는 봉사 자체도 훌륭하지만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존엄을 늘 존중하는 자세때문이다. 특히 호스피스시스템이 인상적이었다. 자칫 의료봉사가 직접치료에 치우치다 존엄한 죽음을 보장하는 것을 간과하기도 한다. 여유가 있는 사람이야 알아서 호스피스의료를 받을 수 있다지만 여유가 없는 사람도 존엄한 죽음을 맞이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간과할 수 있는 깨달음을 우리에게 줬다.

배: 죽음 앞에서는 부자나 가난한 사람 모두 동등하다. 두렵고 무섭다. 전진상 호스피스병동에 오는 말기환자들은 모두 겁에 질려서 온다. 하지만 전진상에 와서 2~3일이 지나면 대부분 평온해 진다. 갑작스러운 호흡곤란이나 통증에 두려움을 느꼈다가도 의사와 간호사가 늘 24시간 대기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우리가 같이 하고 있다는 진정성이 느껴지면 평온해 진다.

▲ ⓒ의협신문 김선경 기자
이: 전진상의원은 설립 당시인 1975년부터 호스피스의료 시스템을 갖추고 시작한 것으로 안다. 호스피스에 대한 개념이 아직 생소할 때인데 꽤 선진적이었다.

배: 호스피스의료에 대해서는 할말이 정말 많다. 인간답게 일생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은 인권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를 보장하기 위해 나서야 한다. 우리는 이상하게 호스피스의료를 대학병원 중심으로 하는 것 같다. 외국은 독립형 호스피스가 많다. 대학병원은 호스피스병동을 일반병동도 아니고 중환자실도 아닌 어중간한 성격으로 운영하는 것 같더라.

그러다보니 통증치료에 쓰일 마약을 구할때 애를 먹었다. 호스피스의료는 대형병원에서만 하는 걸로 생각하고 있는데 구멍가게인 의원에서 자꾸 마약이 필요하다고 하니깐 오해를 하는 거다. 말기암 환자에 쓸 마약을 잘 안주려해서 내가 막 "마약 주세요. 달라고요"하고 소리치기도 했다. 한때는 배 원장 마약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길을 받아야 했다. 갑작스런 마약단속도 받고 범죄인 취급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 점이 힘들었다.

이: 전진상의원은 어려운 환자를 진료하지만 진료비는 반드시 받도록 하는 시스템이다. 이유가 있나?

배: 그것은 그분들의 'dignity(자존감)'이기 때문이다. 물론 진료비를 안받는 경우도 있지만 진료비를 반드시 받는다는 것이 원칙이다. 대략 5가지 단계로 진료비 부담정도를 나눠 단돈 100원이라도 받는다.

전진상 의원은 설립 당시부터 환자에게 모든 케어를 다 제공한다는 시스템을 목표로 했다. 지금도 웬만한 것은 다 해결한다. 아쉬운 대로 각과마다 필요한 의료장비를 갖추고 있고 마지막 단계인 호스피스시스템도 잘 갖춰져 있다.

왜 이런 시스템을 갖추게 됐겠는가. 가난한 사람은 병원에 가는 것 자체가 공포다. 병원가면 모든 것이 돈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전진상에서 해결이 안돼 큰 병원에 환자의뢰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마다 전화를 걸어서 특별히 부탁한다.

돈이 없는 환자라는 것을 감안해 반드시 필요한 검사와 진료위주로 해달라고… 대부분은 진료를 받고 전진상으로 다시 온다. 대학병원에서는 감당이 안되기 때문이다.

이: 최근 배 원장이 이런저런 일로 널리 알려졌다. 유명해져서 좋은 점이 있는 반면, 나쁜 점도 있을 것 같다.

배: 나로 인해 어려운 이웃들의 목소리를 듣게 될 수 있다는 게 가장 좋은 점이다. 나쁜 점은 별로 조명받아야할 사람이 아닌데 자꾸 조명을 받는 점이랄까?

이: 한국에서 41년을 살면서 근현대사를 다 경험하게 됐다. 한국사회에 할말이 있다면.

배: 외국인이기 때문에 이런 말 할때면 조심스러워 진다. 하지만 버려지는 노인들에 대한 문제는 지적해야 할 것 같다. 한국은 너무 빨리 성장했다. 그러다보니 어떤 사람들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뒤처진다.

예전에는 그래도 가족이 버팀목이 됐지만 최근들어 가족시스템도 붕괴되면서 어려움에 내몰린 노인들이 많아졌다. 내가 진료하는 사람들의 90%가 노인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인터넷 세상이 돼 전세계 곳곳을 동시간에 볼 수 있는 세상이 됐다지만 정작 바로 옆에 있는 노인들의 곤궁함은 보지 않는 것 같다.

우리 주변에 분명히 다수가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거나 보려하지 않는 노인들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회적인 노력이 지금보다 훨씬 더 커져야 한다.

가난한 노인들을 위해 진료봉사도, 호스피스의료서비스도 열심히 할 거다.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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