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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심사 투명화…의학-재정적 판단 분리해야"

특집 "심사 투명화…의학-재정적 판단 분리해야"

  • 이은빈 기자 cucici@doctorsnews.co.kr
  • 승인 2013.01.04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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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료 4.0시대' 진화를 꿈꾼다 -규제를 벗어나며 -

#1. 2010년 여름, 한 대학병원 교수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난치성 담도염 치료의 권위자로 알려져 있는 그는 소아환자 P군의 진료비 100여만 원을 두 차례에 걸쳐 삭감당했다. 즉시 이의신청을 제기했지만 돌아온 것은 급여 일부분. 행정소송이 시작되자 심평원은 뒤늦게 두 건의 삭감분을 급여로 인정하겠다고 병원측에 통보해왔다.

#2. 대구에서 하지정맥류 전문병원을 운영하던 A원장은 지난해 9개월치 진료비가 모두 깎였다. 2011년 4월부터 12월까지 시행한 하지정맥류 수술 급여비 전체가 심평원 심사과정에서 조정된 것. 그는 "청구시 역류 초음파 사진을 첨부하도록 관련 고시가 개정된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치료를 안 한 것도 아니고, 자료를 내지 않았다고 진료비를 한 푼도 주지 않는 건 부당하다"며 이의를 제기했지만 거부당했다.

삭감(削減). 깎아서 줄인다는 뜻의 한자어. 경기침체로 임금이 삭감됐다거나, 경비를 삭감했다거나 할 때 쓰인다. 주로 특수한 상황에서 나오는 말이지만, 이 용어를 일상생활에서 유난히 친숙하게 느끼는(?) 직종이 있다. 진료현장의 의사들이다.

심평원이 지난해 9월 민주통합당 이목희 의원실(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11년 심사과정에서 삭감된 급여비가 2200억 원, 조정건수는 2015만6000건을 넘어선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2010년도 대비 조정건수 7.3%, 지급제외 금액은 10.6%가 늘어난 것이다.

보건복지부 급여고시와 심평원 심사지침은 건강보험이 어디까지 급여를 보장하는가에 대한 기준을 정한 것으로, 급여기준에 맞지 않는 청구는 삭감·조정된다. 문제는 한정된 재원을 분배하기 위한 목표로 심사가 이뤄지다보니 삭감 내역에 대해 의사들이 수긍하기 어려운 사례가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는 밀실에 가려진 심사기준과 제한적 인프라로 말미암은 기계적 심사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민주통합당 김용익 의원은 2012년 국정감사에서 요양급여비용을 삭감하고도 심사사례를 공개하지 않는 심평원의 행태를 강하게 질타해 관심을 모았다.

그는 강윤구 심평원장을 향해 "심평원 심사사례가 구멍가게 전표냐"고 따져 물으면서 "심사사례를 유형화해 투명하게 제시할 때 의료계로부터 신뢰 받을 수 있고, 의학적인 근거가 부족할 경우 모니터링도 받을 수 있다. 검토하겠다는 말만 하지 말고 대책을 내놓으라"고 촉구했다.

심평원은 심사사례 가운데 난이도가 높거나 전문성이 필요한 사안의 경우 '진료비심사평가위원회'를 통해 심사하고 있지만, 현장에서 진료지침으로 활용될 수 있는 심사사례는 극히 일부만 공개하고 있어 폐쇄성이 짙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지난해 진료심사평가위에서 공개한 심의결과 건수는 전체 6665건 가운데 1.44%인 96건, 2010년 심사한 5682건 가운데 1.51%인 86건에 그쳤다<표1>.

<표1> 진료심사평가위원회 심의결과 공개 현황

  본원 지원 소계 공개건수 공개율
2010년 3012 2670 5682 86 1.51%
2011년 2833 3682 6665 96 1.44%

 *건강보험심사평가원. 김용익 의원실 제출 자료

의사 100명 중 1∼2명만이 자신의 요양급여비용 심사가 어떻게 처리됐는지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시스템이란 얘기다.

심사 1건 당 처리시간 1분 미만 "3분 진료보다 더해"
의료계가 "정해진 틀이 의료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문제를 제기해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전문지식과 경험을 통해 올바르게 판단한 치료행위임에도 불구하고, 획일적인 심사기준에 의해 부당청구 의사로 몰리는 상황을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의사들은 이른바 '최선의 치료'와 '기준에 맞춘 치료' 사이에서 딜레마를 호소하고 있다. 때로는 환자를 위해 과감한 판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다가와도, 기준에 충실한 진료만 하다보면 책임 없는 악결과가 생길 수 있다.

김연경 판사(인천지법 부천지원)는 지난해 11월 대한의료법학회 학술대회에서 "엄격한 통제기준을 적용함으로써 이윤 창출이 아닌, 월급을 받는 것에 불과한 대형병원 의사들마저도 삭감에 대해서는 억울하다고 말할 정도"라며 "법령상 어느 것에도 포섭되지 않는 진료행위는 계속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규율과 현실의 간극이 크다"고 했다.

이 같은 불협화음의 원인은 역설적이게도 의학지식 바깥 언저리에 있다. 요양급여비용이 어떤 행정적 프로세스로 심사되는지를 짚어보면 규제의 맹점이 드러난다.

요양기관이 심평원에 청구하는 급여건수는 통상적으로 연간 12억여 건에 달한다. 모든 심사물량에 일일이 사람 손을 거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1차 전산심사를 거쳐 전담인력에 의한 2차 전문심사가 이뤄진다. 이 방대한 심사처리는 대부분 간호사 출신인 순수심사인력 450여명의 몫이다.

2011년 감사원 자료에 따르면, 1인당 전문심사 건수는 연간 22만여 건, 1일 1099건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그림>.

 

1건당 평균 처리시간은 심평원 본원의 경우 54.4초, 지원은 25.2초 정도로 채 1분이 되지 않는다. 정밀한 심사를 하기란 출발선에서부터 불가능에 가깝다.

변화는 조금씩 감지되고 있다. 국감에서 김용익 의원의 집중 질타를 받은 심평원은 12월 18일 심사·평가·현지조사 등 주요 업무분야에서 불합리하거나 투명성이 낮은 사례를 적극 발굴해 개선·공개하는 업무 쇄신안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심사 관련 급여기준 안내시스템을 가동하고, 심사조정내역통보문의 내용을 상세히 보완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심평원은 변신 중? 규제일변의 고정적 틀을 탈피하라
급여를 제한하는 280여개 규제적 급여기준에 대해서도 대수술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특정 검사나 수술과 관련해 인정이 가능한 적응증을 정하거나, 보험급여가 가능한 기간·횟수 등을 정해놓은 사례 가운데 위급한 상황에서 진료제한을 가져올 수 있는 항목들을 우선검토 대상으로 한다는 방침이다.

이는 관료주의적 심사기준이 일부 베일을 벗는다는 점에서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기계적 삭감으로 대표되는 고질적인 문제를 그대로 안고 있다는 한계를 지닌다.

'교과서대로' 진료하는 환경을 꿈꾸는 의사들에게 근본적인 해결책은 요원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다고 보험재정 긴축이라는 고삐를 쥔 정부에게 마냥 이상을 강요할 수도 없다. 보다 시야를 넓게 가질 필요성이 있지 않을까?

핵심은 의학적 판단기준과 재정적 판단기준을 분리해 협의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의학적으로는 어긋나지 않더라도 재정상의 문제로 불가피하게 급여를 제한해야 한다면, 독립성이 보장된 협의체를 구성해 범위를 조율하는 방식이다.

심평원 입장에서는 재정을 책임지는 축에서 기준을 만드는 부담을 덜고, 행정적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이점도 있다. 이러한 시스템이 가동되기 위해 전문가 집단과 정부간의 상호 신뢰가 전제돼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자본주의 4.0'의 저자 아나톨 칼레츠키는 "불확실한 세상에서는 시장 결정과 정부 결정 모두 시행착오를 거치며 갈지자 행보로 나아갈 것"이라며 정부 정책은 경제 시스템이 변화하는 여건에 적응하면서 계속 진화해가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구시대적 잣대를 갈고 다듬는 수준으로는 급속한 고령화로 야기되는 비용 팽창 등의 문제를 따라잡을 수 없다. 정부가 재정 중립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전문가와의 소통을 바탕으로 새로운 진화를 모색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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