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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24-04-16 17:03 (화)
G 선상의 아리아
G 선상의 아리아
  • 이영재 기자 garden@kma.org
  • 승인 2012.12.06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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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석(서울 윤영석내과의원장)

윤영석

(서울 윤영석내과의원장)

"원장님, 원장님, oh, no! ○○님이 운명하신 것 같아요". 숨 가쁘게 들려오는 도우미의 전화 속 목소리가 울먹였다. 그녀는 서너 시간 전에 우리 병원에서 호흡곤란과 위출혈로 대학병원 응급실에 급히 옮겨진 상태였다. 그녀가 응급투석과 수혈을 받기 위해 보호자의 동의를 기다리던 중 심장과 호흡이 멎은 것이다. 서서히 눈꺼풀이 감기고 있는 그녀의 곁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에 도우미는 눈시울을 적셨다. 오랫동안 자신이 밤낮으로 돌보던 환우가 순식간에 생사의 길이 갈린 것이었다. 보호자가 없던 그녀에게 도우미는 엄마이자 수호천사 같은 존재였다. 그런 도우미에게 그녀와의 마지막 이별은 혈육을 잃은 아픔이었으리라.

"원장님, 숨이 몹시 차요, 어제 저녁에 새까만 대변을 보았어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늘따라 그녀는 몹시 보채며 안절부절 못한다. 끼니를 제대로 챙기지 못한 그녀의 앙상한 몰골이 죽음의 문턱에 가까운 것을 느끼게 한다. 혈압 85/50 mmHg, 체온 37도, 삶과 죽음의 위험 신호들이다. 그녀는 최근 들어 미열·전신통·무력감·부종 등을 자주 호소했다. 그녀는 만신창이가 된 양팔의 혈관 때문에 생명선인 투석용 영구도관이 가슴팍에 꽂혀 있다. 도관이 막히거나 염증이라도 생기면 그녀는 투석을 중단해야 한다. 그야말로 외줄타기를 하면서 협곡을 건너는 곡예사처럼 그녀의 삶은 하루하루가 아슬아슬하다.

오늘도 급박한 상황에서 혈액투석을 시작한다. 영구도관에 투석 라인을 연결하고 투석막으로 검붉은 혈액을 보내니 혈압이 요동친다. 퉁퉁 부어오른 얼굴에 산소 마스크를 씌웠으나 숨을 몰아쉬며, 가슴이 답답하다고 맥없이 울먹인다. 수혈을 하면서 동시에 천천히 투석기 모터를 돌린다. 혈색소가 5.3g/dl으로 위 출혈이 심한 듯하다. 투석중에도 "숨이 차고 너무 힘들어요" 라고 중얼거리며 얼굴을 찡그린 그녀에게 연민을 느낀다. 생에 대한 애착이 유난히도 강한 그녀의 절규에 간호사도 안쓰러워 한다. 아무래도 개인병원에서 투석을 더 이상 지속하기에 한계를 느낀다. 대학병원에 응급을 알리는 신호를 급히 보낸다.

그녀의 나이 60세, 그러니까 천상의 하느님께서 그녀를 부르신 것은 그녀가 만성 콩팥병으로 혈액투석을 시작한지 31년째 되는 해이다. 생의 절반을 병마와 싸우며 살아온 셈이다. 아픔을 잊으려 대학병원을 떠나 우리 병원에 온지 17년, 한 많은 투석의 흔적들을 수없이 남겼으니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다. 입원과 퇴원을 거듭하며 떠 밀려온 그녀의 영혼과 육신은 향기로운 봄날의 라일락보다 서리 맞은 가을의 국화꽃이다.

1982년 그녀는 신장이식 수술에 성공한다. 이식후 하느님께서 그녀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은 금쪽같은 딸이었다. 이식후 자녀를 얻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남편과 헤어진 그녀에게 자신의 분신을 얻은 것만큼 커다란 기쁨이 또 있으랴. 그 후 그녀의 보배는 일본에 유학을 갔다. 유학중인 딸을 기다리는 것이 그녀의 삶의 일부가 된지 오래였다. 몇 년 전 정부가 그녀에게 분양했던 조그만 임대주택을 받고 그렇게도 기뻐하던 천진스런 얼굴이 순간 머릿속을 스친다. "딸이 돌아오면 같이 살아야지" 하면서 자랑하던 그녀가…. 그러나 그 딸은 지금쯤 하늘아래 어디에서 엄마의 영혼을 만나고 있는지? 오늘따라 안부를 묻고 싶구나.

그녀에게 행복은 사치였던가? 10여 년간 유지되던 이식신의 기능이 말썽을 부린다. 결국 만성 거부반응으로 또다시 생의 굴레인 혈액투석을 시작하게 된다. 여기에 이식후 만성 B형 간염이란 혹까지 얻었으니 할 말을 잃는다. 그녀의 삶의 굴곡은 신이 마치 육체와 영혼이 어디까지 망가져야 삶을 끝낼 수 있는가를 시험하는 것 같다. 이는 마치 만신창이 몸으로 버텨가는 그녀가 '살아야 겠다는 의지' 하나로 얼마 동안을 살 수 있느냐를 보는듯한 느낌이다. 그러기에 나는 토마스 스타즐(Thomas Starzl) 교수가 <puzzle human>에서 희망하는 새로운 '재생인간'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망가진 인간의 장기를 자동차 부품 교환하듯 모조리 바꾸어 '짜깁기 인간'인 puzzle human으로 다시 탄생되기 전까지는 인간의 수명을 무한대로 연장시키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는 듯하다.

1984년, 그녀를 병상에서 처음 만났을 때 창백한 얼굴에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G 선상의 아리아'에 대한 얘기를 나누던 그녀가 바이올린리스트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 그리고 4중주 악단장으로 활발한 음악 활동을 하는 것도 듣게 되어 바이올린에 문외한인 나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이때부터 아주 가끔 G선상의 아리아 음률을 듣게 되면 그녀와의 음악 얘기가 떠올랐다. 아리따운 여인과 엄숙하고 경건한 사랑의 고뇌를 부드럽고 아름답게 노래한 곡이 G 선상의 아리아라고 하던 그 얘기가…. 아리아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그녀는 자신의 운명이 G 선상의 아리아와 반대로 빗나가고 있다는 것을 예견한 듯하다.

만성 콩팥병을 앓던 그녀가 주치의로부터 "투석치료가 필요 합니다"라고 처음 들었을 때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녀인들 그 충격을 수긍하고 싶었을까. "왜 나에게만…"이라는 혼란스런 멍에와 함께 말이다. '완치되기 어렵다'는 생각은 그녀를 서서히 압박했다. 그리고 그것은 넘기 어려운 삶의 장애물이었다. 아니 천형이었다. 어두운 장막을 걷어치우기 위해 그녀는 스스로 운명에 대한 분노를 녹여야 했다. G 선상의 아리아를 켜면서 말이다.

그래도 비교적 유지투석으로 일상을 하던 무렵, 마치 새끼를 품은 캥거루인양 항시 바이올린을 품고 다니면서 음악인의 자긍심을 가졌던 그녀였다. 그러던 그녀가 어느 날 뇌졸중으로 반신불수가 되고 만다. 아직도 망가질 장기가 남아 있었구나 하면서 나는 잠시 신을 원망해 본다. 그러나 절망에 빠졌던 그녀는 시간이 경과되면서 스스로 마비된 팔다리에 조금씩 적응돼 갔다. 휠체어 생활에 맞춰야 한다는 현실을 깨닫게 되는 것을 보며 한편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때부터 나는 그녀가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고 희망을 포기하지 않기를 바랐다. 아울러 심한 우울증이나 좌절을 보이지 않도록 재활치료를 권했다.

그러던 그녀가! 그녀의 모질고도 짧은 삶이 오늘 막을 내린 것이다. 죽음의 장송곡을 울리는 것이다. 죽음의 어두운 숲속을 거닌 것이다. 죽음의 불꽃 속에 타들어 간 것이다. 그러나 삶과 죽음이 하나이기에 그녀의 죽음 속에 삶의 흔적들이 영원히 남을 것이다. 비록 그녀는 아리아의 선율에 맞춰 노래하고 춤추는 꿈같은 삶을 살지는 못했으나, 분명 지금쯤 천상에서 부드럽고 감미로운 G 선상의 아리아를 들으며 잠들었으리라. 바람처럼 자유롭고, 둥지처럼 편안한 그곳에서 영원히, 영원히…. 그녀는 죽음 이후의 부활과 영원한 삶을 믿는 바이올린리스트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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