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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 우리 일, 남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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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09.21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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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희(대구의료원 소아청소년과)

▲ 정명희(대구의료원 소아청소년과)

마당에 내려서니 경비원 아저씨가 반색한다. "고마워요. 소장한테 칭찬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몰라요. 저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네요. 일러준 대로 했을 뿐인데…."

태풍이 온다던 날이었다. 아파트 현관에 들어서니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 둘러보았지만 별다른 점은 없었다.

이튿날, 엘리베이터에 쪽지가 나붙었다. '음식물 쓰레기를 흘리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청소를 아무리 잘해도 갇힌 냄새는 사나흘은 지나야 빠집니다.' 소독을 자주 하고 있으니 조금만 참아 달라는 관리소장의 안내문이었다.

그날 저녁, 엘리베이터 안은 난데없이 향냄새로 가득했다. 누군가 괴로워하다가 냄새를 태워서라도 없애버리려고 시도했나 보다.

갖은 노력에도 냄새가 나날이 짙어져 갔다. 문이 여닫힐 때마다 뭉글뭉글 피어오르는 그 냄새로 아파트 전체가 흐느적거리는 것 같았다. 자꾸 냄새에 시달리다 보니 머리가 아프고 현기증이 났다.

그렇게 힘들게 지내던 어느 날, 갑자기 의사 초년병 시절에 보았던 어떤 장면이 번쩍 떠올랐다. 그 무렵에는 부검이 의뢰돼 오면 나도 따라 들어가 참관을 하곤 했다. 내 기억의 창고에 저장되어 있던, 한번 맡아보면 잊지 못할 바로 그 냄새 같았다. 세상이 흉흉하여 설마 싶다가도 혹시 싶어 걱정됐다.

며칠 전 엘리베이터 점검하던 일도 생각났다. 승강기를 들어 올리는 줄과 도르래가 작동하는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 걸 보았는데 그곳에 무엇이 죽어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가슴이 벌렁대기 시작해 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관리실에 찾아가 진지하게 얘기했다. "이 냄새는 음식물 쓰레기 냄새가 아니라 동물 같은 것이 썩을 때 나는 고약한 냄새일 수 있습니다. 엘리베이터 회사에 연락하여 꼭 점검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교대 근무하러 들어온 경비아저씨가 무릎을 탁 친다. "냄새 때문에 주민으로부터 쉴 틈 없이 거세게 항의하는 인터폰만 받았는데, 듣고 보니 아차 싶네요." 강력한 소독약으로 청소만 죽자고 해대었지 승강기 통로 지하 바닥을 점검해 볼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드디어 서비스업체 직원이 급히 불려와 승강기를 세워두고 바닥으로 내려갔다. 태풍의 눈은 다행스럽게도 서생원이었다. 엘리베이터 문틈으로 들어가다 실족하였는지 큼지막한 쥐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것도 저승길 떠난 지 꽤 되어 보인다는 것이다. 여름의 습기와 기온 탓에 쉽게 부패하였을 것이고 엘리베이터 통이라 빠져나갈 곳이 없으니 냄새가 점점 더 진동했던 모양이다.

내 말을 귀담아 들어 준 그 아저씨는 냄새 태풍을 극적으로 해결한 일등공신이 됐다. 연일 머리를 맞대고 궁리해도 해결이 되지 않아 큰일이라고 걱정만 하고 있던 터에 내 이야기를 들으니 갑자기 반짝 불이 켜지는 것 같더라고 했다.

고약한 냄새를 여러 날 참고 견딘 우리 인내심이 놀랍다. 공동으로 쓰는 엘리베이터에서 나는 냄새를 모두가 '내 일'이라고 생각했더라면 어땠을까. 최소한 '우리 일'로 여겨 서둘렀더라면 더 빨리 해결되지 않았을는지. 누군가 대신해주리라 믿고 '남의 일'로 여겼기에 더 오래 참고 견뎌야만 하지는 않았나 싶어 스스로 돌아본다.

오늘도 나는 마음속으로 읊조린다. '누가 해도 할 일이면 내가 하자. 언제 해도 할 일이면 지금 하자. 내가 지금 할 일이면 더 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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