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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마음을 얻는 일

청진기 마음을 얻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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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07.27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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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희(대구의료원 소아청소년과)

▲ 정명희(대구의료원 소아청소년과)

출근하니 진료실 책상 위에 보따리 하나가 놓여 있다. 조심스럽게 풀어보니 콩과 밤, 대추 따위를 섞어 만든 만경떡이다. 지난 주말 퇴원했던 아이 엄마가 가져온 것이라고 간호사가 귀띔한다.

입원한 지 며칠이 지나도록 열이 오르내리고 많이 아파하며 끙끙대는 아이를 데리고 잠을 설쳤다 하면서도 환아 엄마는 주말엔 꼭 한산도엘 다녀와야 한다고 했다. 이유를 물어도 대답도 없이 그는 무작정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진료를 마치고 엄마를 또 설득해 보았다. 치료하지 않으면 올 수 있는 합병증이 많다. 그 섬은 이번에 가지 않아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이지만 아이는 치료를 중단하면 정말 힘든 일이 생길 수 있다.

다른 일도 중요하지만, 자식의 건강을 먼저 생각해야 하지 않느냐. 만약 아이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살 것이냐며 애원 반 협박 반 엄포를 놓아두고 퇴근을 했다.

그렇게 하면 가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도 병원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자퇴원에 서명까지 하고는 늦은 밤에 아이를 데리고 가버렸다는 것이다.

아무리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 세상이라지만 심하게 아픈 아이를 부모라도 마음대로 결정해서는 안 될 것인데 싶었다. 여러 가지 검사 소견만큼 아이 상태도 좋지 않아 걱정하고 있는 내 마음이 부질없게 느껴지고 속이 적잖이 상했다.

월요일, 아이 엄마가 찾아왔다. 이른 아침부터 기다리고 있었다면서 깨끗이 나을 때까지 다시 입원하여 치료받기를 원했다. 내 눈과 마주치더니 그땐 감정이 복받쳐서 자기의 아픈 사정을 다 이야기할 수 없었다며 고개 떨군다. 날이면 날마다 병원을 들락거리는 것을 자기 탓인 양 생각할 어른들을 떠올리면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집안사람 모두 모이는 그날 모임에 얼굴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단다.

시어른이 반대하는 결혼을 했고, 그 후로도 사이가 좋지 않은데다가 병약했던 자기를 닮았는지 아이가 너무 자주 아파 늘 주눅이 들었다고 했다. 시댁에서 전화가 오면 입원한 것을 들킬까 봐 화들짝 놀라 화장실에라도 들어가 조용히 받아야만 할 정도였단다. 남편도 시댁 어른께는 아이들이 자주 아픈 사실을 숨기고 눈치를 보는 것 같아 더욱 사실대로 알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른 식구들이 섬에서 즐겁게 지내는 동안 노심초사하며 아이와 자기 방 안에서만 지내다 왔다며 손에 얼굴을 묻는다.

연신 눈물 섞인 콧물을 닦아가며 아이가 밤새 기침을 해댈 때 자기의 가슴도 손톱으로 후벼 파는 것처럼 아팠다며 꼭 다시 받아달라는 호소다. 간절히 만류하는데도 가야만 했던 일과 다시 입원하려니 면목도 없고 미안해서 새벽같이 떡을 해왔다며 급기야 눈물을 쏟아낸다.

명절이 다가오면 별것도 아닌 병을 가지고 애들을 입원시키려는 이도 있는데, 열이 펄펄 끓고 있는 아이까지 억지로 퇴원시켜 시집에 데려가야 할 만큼 어려운 사이가 되어 버린 그의 처지가 안타까웠다.

지금 내 앞에 놓인, 여러 가지 재료가 섞인 먹음직스러운 떡이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잘 이해하며 조화롭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살면서 가장 어려운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 아닐는지 싶은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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