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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지하철에서

청진기 지하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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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07.20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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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부산알로시오기념병원 소아청소년과장)

▲ 이정희(부산알로시오기념병원 소아청소년과장)

방금 떠난 지하철을 물끄러미 바라만 본다.

지하철은 나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시간이 나를 기다리지 않았던 것처럼. 뒤끝이 보이지 않은 화살처럼 지하철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뒤돌아보지도 않는다. 놓친 나는 아쉽지만 떠난 지하철은 냉정하다. 1분만 서둘렀으면 탈수 있었을 텐데. 여태껏 살면서 이렇게 후회하고 뉘우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며칠 전, 감기로 고생한 다음날인 7월10일은 나에게는 특별한 날이었다. 바야흐로 노령복지혜택을 받는 민망한 날의 시작이었다. 오뉴월 염천에 남이 안하는 여름감기를 하고 노년기에 접어드니 기분은 착잡하고 세월은 야속하다. 하지만 아직도 마음만은 젊다.

노인의 기준이 65살로 정해진 건 평균기대수명이 50살 미만이던 19세기 후반부터라고 하니 지금 노인 취급받는 건 아직은 억울하고 원통하다. 전에도 아기를 데리고 진료실을 찾은 젊은 엄마에게 가끔 '할아버지' 소리를 듣곤 했다. 처음에는 듣기가 좀 언짢고 거북했으나 일일이 내색은 못 했다. 그러다 5년 전 외손이 태어나 정식으로 할아버지가 되었다.

3차원의 시공간에서 시간이란 쉬지 않고 지나간다. 어떤 때는 쏜살 같이 빠르게 지나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큰 강물처럼 천천히 흐르기도 한다. 그러나 언제나 멈추는 법이 없고 쉬지도 않는다. 붙잡아 두고 싶은 아쉬운 시간도, 기억조차 하기 싫은 좌절의 순간도 물처럼 흘러가고 바람처럼 떠나간다.

청춘이 떠나고 노년기에 들었다고 초조할 것은 없다. 마음먹기 나름이다. 지금이 아직 남아 있는 내 인생에서 가장 젊을 때라는 사실이 고무적이다. 세월이 무심하게 흐르는 것 같아도 속이 빈 인간을 철들게도 하나보다. 이제 세상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산이 산으로 보이고 물도 물로 보인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이 바로 보이고 마음은 아직 젊다하나 속속들이 찾아오는 노화현상은 숨길 수 없다. 노화란 어느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자연현상 아닌가. 비가역적이고 불가피한 변화가 아니라 가역적이고 능동적인 변화로 후하게 보는 사람도 있지만 신체가 알게 모르게 늙어가고 있다니 썩 기분 내키는 일은 아닌 것 같다.

노화현상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이 정지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고 흐름이다. 사람에 따라 일찍 찾아오기도 하게 늦게 나타나기도 한다. 출생 직 후 아이 시력은 급속히 발달하여 대여섯 살 쯤 되면 거의 어른 시력에 도달한다. 그러다 7살부터 노화가 시작되고, 사오십 대가 되면 노안이 온다.

혈관은 10살부터, 미각은 13살부터, 체력은 17살부터 노화가 시작된다. 뇌는 20살부터 서서히 노화가 진행돼 뇌세포가 망가지고 고령이 되면 노망이 든다고 한다. 이런 피할 수 없는 노화의 과정에 순응하며 잘 적응하는 것도 삶의 지혜이다.

기다리던 지하철이 들어오고 있다.

지나간 지하철은 벌써 과거가 되었다. 조금 전에 놓친 지하철에 대한 아쉬움도 벌써 잊었다. 기다리던 사람들과 함께 지하철을 탄다. 자꾸 텅 빈 경로석으로 눈이 간다. 어쩐지 아직은 그 자리가 내 자리가 아닌 것 같다. 그 자리에 앉기에는 어색하고 왠지 쑥스럽다.

스마트폰을 만지던 어린 학생이 자리에서 일어서려한다. 요즘도 예의바른 아이들이 철없는 아이보다 더 많은가 보다. 지친 학생 자리를 차지할 만큼 염치가 아직은 없지 않다. 빈자리를 찾는 어르신에게 자리를 양보하던 적이 어제 같은데 이제는 입장이 바뀌었다.

바깥은 폭염인데 늦가을 새벽 공기처럼 시원한 지하철에 무임승차한 나는 약간 불편하다. 복지제도의 수혜자가 된다하여 마냥 즐거워 할 일은 아니다. 앞으로 평균 수명의 연장으로 이런 복지혜택을 누릴 노령 층은 계속 증가하고 일하는 젊은이는 차츰 줄어 생산력이 떨어질 건 뻔하다.

나는 지금 편안하게 지하철을 타고 있지만 이 빚을 누가 갚을까. 세상천지 모르고 즐겁게 뛰어놀고 있을 아이들 얼굴이 떠오른다. 내가 누리는 이 호사스러운 혜택을 대신 갚아줄 졸고 있는 지친 학생의 어깨 짐이 무거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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