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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매축지마을의 유일한 의사선생님 웃음에 담긴 철학"
"부산 매축지마을의 유일한 의사선생님 웃음에 담긴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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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06.22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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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역에서 부둣길을 따라 가다 보면 마주하게 되는 마을이 있다. 행정구역명으로는 범일5동. 일제시대부터는 매축지(埋築地)마을로 불린 곳이다. 바다를 메워 마을로 만들었기에 매축지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매축지마을은 일제 강점기 시절 대륙지배를 위해 부산을 발판 삼아 일본인들이 부산으로 많이 이주해오게 하면서 마을의 형태를 띄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에 주민이 대거 몰려든 때는 바로 한국전쟁 시절이다. 부산으로 온 피난민들 중 마땅한 피난처를 찾지 못한 그들에게 이곳은 삶의 쉼터가 되어 주었다고 한다.

2012년 현재 매축지마을은 1970년대에서 시간이 멈춘 듯하다. 재개발지역으로 지정되었지만 개발은 멈추어 있고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노인들만 좁은 골목에서 옹기종기 모여 지나온 시간만 이야기 하고 있다. 이젠 서민이 등장하는, 또는 지난 시절 영화의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고 있는 매축지마을.

5500명 가량의 주민 중 65세 이상 노인은 1100명. 인구의 1/5이 노인으로 구성된 이 마을에 가장 필요한 존재는 바로 의사선생님일지도 모른다. 매축지마을의 주치의로 14년 째 함께하고 있는 이가 있으니 바로 혜명의원 황수범 원장이다.

 황수범 원장.
산복도로를 따라 좁은 골목이 연결된 마을을 따라 들어가니 오래된 간판 하나가 보였다. 2평 남짓한 방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낮은 마을에서 3층짜리 혜명의원은 쉽게 눈에 띄었다.

"원래 선배가 하던 곳이었어요.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의 느낌은 '편안하다'였습니다. 그 마음이 저를 붙들어두고 있습니다."

올해 56세인 황수범 원장이 매축지마을의 주치의가 된 것은 1998년이었다. 지체장애 2급인 황 원장은 남들보다 걸음이 조금 느리다. 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대학입학이 어려웠던 시절을 건너오며 고등학교 졸업 5년 후인 1980년이 되어서야 조선대학교 의과대학생으로 입학할 수가 있었다. 1980년 '세계장애자의 해'를 맞아 장애우에게 대학 입학의 기회가 좀 더 주어지면서 어렵게 의학도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문과계열이었던 황 원장에게 의과대학이 적성에 꼭 맞는 것은 아니었다.

"대학 공부를 어렵게 했던 편이었어요. 이 시험 저 시험 많이도 떨어져봤고 그 덕에 후배들과 공부를 해야 하는 신세도 되었지만 그 덕에 실패하고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정을 조금 더 잘 알게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어렵게 공부한 덕에 개원을 하고 환자들을 만나는 지금은 아주 행복합니다.

서민동네인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알코올 중독자나 만성질환자가 많았죠. 주먹 깨나 쓴다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그사람들 모친을 정성을 다해놓으니까 입소문이 나서 얼마전 텔레비전 다큐 프로그램에 우리 마을이 나왔는데 나도 잠깐 나왔더니 그걸 보고서는 '원장님 감축드립니다'하고 인사를 하더군요 하하."

지금은 많이 개선이 되었지만 불과 2년 전만 하더라도 이곳은 3無3多 불리던 곳이었다. 대부분의 집들은 부엌과 화장실·나무가 없었다. 5평 남짓한 집 안에 화장실과 부엌을 넣을 공간이 있을리 만무했던 것. 대신에 도심공동화현상으로 이 곳을 떠난 이들이 많아 빈집과 공동화장실·노인이 많았다.

▲ 과거의 시간이 멈춘 듯한 매축지마을, 이곳에 혜명의원이 자리잡고 있다.
지금은 골목 곳곳에 벽화가 그려지고 회색에서 원색의 마을로 활기가 생겼지만 여전히 노인의 비율이 많을 수밖에 없다.

황 원장은 환자에게 약과 주사를 주며 진료를 한다는 생각보다는 세상사는 얘기 같이 하고 같이 느끼는 것이 본인의 일이라고 한다. "제가 좋은가 봐요. 그분들 이야기를 들어주는게 진료의 절반이죠. 그때는 보통 6남매 7남매 키우던 시절이니까 청상 과부가 돼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지금 애들은 어떻게 돼 있는지 이야기를 들어주죠. 내리사랑이라고 손주 학비도 들어가는데 당신들 약값달라는 소리를 못해 치료비에 쩔쩔매시면 제가 우스개 소리로 그래요 '6남매라면서요? 자식보다 피 한방울 안섞인 원장한테 하는 부탁이 더 쉬워요?'하고 말입니다."

인터뷰 하는 동안에도 마을 노인들이 혜명의원을 수시로 찾아왔다. 지난번에 주사값을 주고 가지 않아 왔다는 환자. 링거를 맞고 돈을 못줬는데 어떻게 하면 되냐는 환자 등. 그 때마다 황원장은 "에고 괜찮습니더. 담에 갖다 주이소. 시력이 더 어두워진 것 같은데 다니는 건 괘아나요?"하면서 가는 걸음걸음을 살핀다.

그의 차량은 경차 마티즈다. 얼마 전까지만해도 경차 중에서 제일 작은 '티코'였다. 경차를 살 형편밖에 안된 이유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이 마을 곳곳을 다니는데는 경차만큼 좋은 차도 없다. 황 원장의 불편한 걸음걸이 대신 이 차는 빨리 원하는 곳으로 데려 가주기에 더없이 고마운 존재다.

"강직성 척수염을 앓고 있는 어르신이 주사 한 대 맞으면 한나절은 빤하니까 이 짧은 거리를 한 시간 걸쳐 병원에 와서 주사 하나 달랑 맞고 가는 것을 보고 왔다 갔다 힘 다 빼고 소용이 있겠나 싶어 차로 모셔다 드리기 시작했죠. 경차가 좋아요. 할머니들이 타시기 쉽고 다리 올리기 쉽고 내가 몸이 불편하니까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할머니를 편하게 해드리는 것 아닐까 싶네요."

그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은 12시간 수업을 하던 때라 가방을 2개씩 들고 가니던 때였다. 거기에 점심·저녁 도시락까지 가방까지 두 손 무겁게 들고 다녔다. 황 원장이 그 무거운 가방을 들고 느릿느릿 교문으로 걸어가면 특별히 봉사정신이 없는 친구라하더라도 그의 가방을 들어주었다고 한다.

친구에게 가방을 맡기고 교문까지 걸어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몸은 편했지만 마음은 불편했다. 친구의 가방도 무거운데 자신의 가방이 짐이 된 것 같아 친구에게 부담이 되지 않기 위해 정문이 아닌 후미진 뒷문을 선택해 다녔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 기억이 지금의 진료 철학으로 자리 잡았다고.

"친구들이 내 가방들어주는 것과 같이 내 배려로 어르신들이 불편함을 느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할머니 하루종일 앉아있으면 관절이 굳어요. 제가 운전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세요? 하면서 다니는 거죠. 재밌어서, 즐거워서 하는거지 도와드려야지 하는 마음으로는 못해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나오는 길에 평상에 앉아 쉬고 있던 한 할머니께 황 원장에 대해 물어보았다.
 "의사선생님은 천사입니더. 우리 다 바래다 주고 못간다하면 직접 찾아오고 이 지팡이 보이능교? 이것도 내 걸어다니는데 힘들다며 선물로 안해줬능교. 우리 병원선생님 잘 좀 써 주이소."

이 할머니의 말씀이 바로 매축지마을 주민 모두의 마음이었으리라. 황 원장은 지난 4월 제40회 '보건의 날' 시상식에서 국무총리표창을 수상했다. 그것도 시민들이 직접 추천한 주인공으로 말이다. 황 원장은 앞으로 '소년 소녀 가장을 돕는 이해의 폭을 조금 더 넓히고 부끄럽지 않은 의사가 되고 싶다'며 활짝 웃어보였다. 그의 미소에는 더없이 맑은 기운이 가득했다.

글·사진 보령제약 사보기자 김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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