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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24-04-19 21:53 (금)
청진기 살아 있음에…

청진기 살아 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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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06.04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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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희(대구의료원 소아청소년과)

▲ 정명희(대구의료원 소아청소년과)

햇살이 뉘엿해지는 시간, 카 오디오에서 들려오는 선율이 평화롭다. 구름 색이 점차 짙어지더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줄지어 늘어선 가로등에 불이 켜지자 빗줄기는 별빛이 되어 흐른다. 빗나간 예보지만 고즈넉한 풍광은 위안이 된다.

"배터리가 방전되고 있습니다." 신호를 기다리는 중에 뜬금없는 경고음이 들려왔다. 뭔가 심상찮다 싶어 갓길로 차를 붙였다. 며칠 전에 점검을 받았던 터라 의아했다.

아무리 살펴도 눈으로 보이는 이상은 없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차 전문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증상을 다 듣고는 별일 없을 거라며 컴퓨터 오류일지 모르니 시동을 껐다가 다시 걸어 보라고 했다. 처방대로 하자 그 소리가 나지 않았다. 역시 명의로구나 감탄하며 순환도로로 접어들었다.

갓길이 없어서 고장 난 차가 서 있으면 교통 혼잡이 극심해 지곤 하던 곳이다. 경쟁이라도 하듯 내달리는 그 도로에서 갑자기 라디오가 꺼져버렸다. 무서움증이 일었다. 긴급서비스가 떠올랐지만 머뭇거리다가는 쌩쌩 달려오는 차와 추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길을 망친 공공의 적으로 교통방송에 나오면 어쩌나 염려도 되었다. 밟는 대로 속도가 잘 붙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강의에 늦지 않게 제발 무사히 도착할 수 있기만을 빌었지만, 고대하던 응답과는 달리 실내등도 빛을 잃어갔다. 불안에 떨며 겨우 목적지에 닿았다. 허둥대며 내려서 주차를 하고 보니 차가 삐딱하게 서 있었다. 수정해보려고 키를 아무리 돌려도 묵묵부답이었다.

긴급출동서비스에서 나온 전문가 진단은 발전기고장이란다. 견인 고리를 걸며 그가 한 마디 던진다. "복불복이지요, 살아 있음이 행복이고." 아무리 점검을 잘해도 모터가 나가는 것은 예상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위로다. 큰 사고로 이어지지 않은 것만 감사하란다.

건강이라면 칼같이 챙기던 동료가 있었다. 바른 생활에 운동도 봉사도 열심이고 늘 사랑을 베풀던 이였다. 봄에만 해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는데 여름휴가를 다녀온 뒤부터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검사를 해보니 암세포가 온몸 구석에 퍼져 손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해를 넘기지 못하고 그는 그리운 이들의 곁을 떠나갔다.

환자를 대할 때면 언제나 조심스럽다. 전화로 상담해 오는 경우는 더욱 그렇다. 늘 보아서 상태를 잘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상황은 시시때때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대수롭지 않게 보이는 증상이 큰 병을 알리는 경고일 수도 있다.

자칫 몸이 보낸 신호를 잘 읽지 못하여 불행한 결과로 이어진다면 그보다 더 큰 일이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진찰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증상만 듣고 조언을 해준다는 것은 또 얼마나 무모한 일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오늘 내 차에 일어났던 일처럼, 환자에게 큰일이 벌어지기 시작하고 있는데도 '괜찮을 겁니다'라며 섣불리 낙관하게 할까 봐 두렵다.

차의 심장이 되살아나자 메르세데스 소사의 가슴을 울리는 노래가 흐른다.

'생에 감사해/ 내게 너무 많은 것을 주었어. /웃음을 주고 울음도 주니/ 내 노래와 당신들의 노래 재료인 즐거움과 고통을 구분할 수 있네./…/ 생에 감사해, 내게 너무 많은 걸 주었어.'

살아 있음에 진정 감사한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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