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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참 나쁜 의사
청진기 참 나쁜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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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05.2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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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부산알로시오기념병원 소아청소년과장)
▲ 이정희(부산알로시오기념병원 소아청소년과장)

우리는 먼동이 터기도 전에 집을 나서 약속된 장소로 향했다.

버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입영통지를 받고 입대하는 까까머리처럼 비장한 각오로 버스에 올랐다. 몇 시간 후, 지친 몸으로 도착한 곳은 아마 보라매공원이었던 것 같다. 잠시 후 비가 쏟아졌다. 바람도 거세게 불었다. 악천후 속에서 힘든 행사가 예상 되었으나 확고한 결의를 호소하기에는 오히려 이보다 더 적합한 분위기가 없을 것 같았다.

비바람 속에서 절규하듯 외쳐댔다. 의약분업 실시를 당장 철회하라고.

하지만 폭풍우 속의 간절한 호소에 그들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수 천 명의 함성이 몇 명 시민단체의 피켓 시위보다 관심을 끌지 못했다. 비속의 항의에도, 바람속의 간곡한 하소연에도 그들은 요지부동이었다. 이제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카드는 휴진이었다.

정당하고 떳떳한 방법은 아니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의사가 환자를 볼모로 집단휴진을 하는 건 차마 못할 짓이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사회적인 비난과 따가운 시선도 부담이 되었다. 닫힌 문을 보고 되돌아 갈 아픈 아이들과 부모의 일그러진 표정이 눈에 선했다.

그때 이웃 아기가 고열이 나서 병원에 왔던가 보다.

갓 돌이 지난 아이. 감기가 들면 열이 나고, 열이 높으면 조절이 어려워 경련 까지 하는 아이. 이 아이가 왜 하필 진료실 문을 잠근 이 비상시국에 열이 났는가. 급히 진료실을 찾은 아기 부모는 닫힌 문을 바라보며 실망과 배신감으로 되돌아갔다고 했다.

몇 달 후에 열이 나서 나를 찾아 온 아기 어머니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선생님, 열 잘 나는 우리 아이 누구보다 잘 알지 않습니까. 어찌 그럴 수가 있어요?"
"죄송합니다. 의약분업의 피해를 막기 위한 불가피한 결정이었습니다. 이해해 주세요."
"금방 경련을 할 것 같은 불덩이를 데리고 왔는데 문은 닫혀 있고…이해를 하라고요? 너무 쉽게 말씀을 하시네요. 선생님이 휴진 할 줄은 몰랐습니다. 실망이 큽니다."

단순한 불만을 넘어선 거센 항의며 질책이었다.
어머니의 얼굴에 나는 믿음이 전혀 가지 않는 의사로, 다시는 상종 못할 의사로,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언제나 병원 문을 쉽게 닫는 아주 나쁜 의사로 그려져 있었다. 열나는 아이를 등에 업고 닫힌 문을 바라보며 얼마나 화가 났으면 이런 막말을 할까.

나는 그때 오래 동안 유지했던 환자와의 신용과 믿음이 완전히 사라지는 걸 느꼈다.
신뢰는 쌓기는 어려우나 무너지기는 너무 쉬웠다. 의사와 환자 사이의 관계는 더욱 그러하다. 이런 믿음이 무너지면 효과적인 진료는 더 이상 기대할 수가 없다.

그 후로는 열이 나서 진료실을 찾던 그 아이의 모습을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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