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을 위한 바른 소리, 의료를 위한 곧은 소리
updated. 2024-03-29 15:21 (금)
청진기 뚫어진 장갑
청진기 뚫어진 장갑
  • Doctorsnews admin@doctorsnews.co.kr
  • 승인 2012.04.20 10:27
  • 댓글 0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밴드
  • 카카오톡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애양(은혜산부인과의원)
김애양(은혜산부인과의원)

처음 수술실에 들어간 날이었다. 본과 3학년 때부터 실습이 시작되자 학생들도 한 명씩 수술에 참여하게 되었다. 내 차례는 담석증 환자의 쓸개 제거술로 2시간이나 걸리는 큰 수술이었다. 과장님을 위시해서 수련의들이 줄줄이 손을 닦았다.

수술실이란 무균상태(asepsis)를 최우선으로 중시하는 곳이라 여느 곳과는 달랐다. 어쩌면 숨도 다른 방법으로 쉬어야 할 것 같았다. 먼저 모자와 마스크를 쓴 다음 손 세척을 했다. 딱딱한 솔에 소독약을 칠하고 손가락에서부터 팔꿈치 위까지 씻었다.

특히 손톱 아래를 집중해서 문지르며 1분 이상 세 차례 닦아냈다. 닦은 손은 무엇과도 닿지 않도록 높이 쳐들고 있어야 했다. 숙련된 간호사가 녹색 수술복을 입히더니 등 뒤에 달린 끈을 묶어주었다.

양손에다 고무장갑도 일일이 끼워주었지만 학생이 수술실에 드나드는 것이 성가시단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무슨 세균덩어리이기라도 한 양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는 것이었다.

모든 준비를 마치자 환자를 가운데 두고 수술팀이 둥그렇게 둘러섰다. 덩치 큰 남자들 사이에 낀 나는 차츰 숨이 조여 왔다. 마스크 때문에 그랬겠지만 수술실은 산소가 희박한 곳 같았다. 집도의를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외과 의사들의 조직력이 보는 이를 주눅 들게 만들었다.

군대보다 더 절도 있고 위엄 가득 찬 모습이었다. 몸 한 구석이 가려워도 꼼짝도 못한 채 서 있자니 전신이 근질거리고 다리 또한 아프기 짝이 없었다. 어서 이 고난의 시간이 지나가기만 기도하고 있었다. 그런 내 사정을 알아채셨던지 과장님이 한 말씀하셨다.

"학생, 장승처럼 서 있지만 말고 피 좀 닦아보지."

지적을 당하자 당황한 나는 거즈를 들고 수술 부위 한 가운데로 손을 들이 밀었다. 그러나 어눌한 손놀림에 그만 봉합하던 과장님의 바늘에 찔리게 되었다. 그 순간 모두 동시에 손을 놓고 수술을 딱 멈췄다. 1년차 레지던트는 간호사를 향해 "글로브"라고 외쳤다.

일개 학생의 장갑 한 짝 때문에 수술을 중단하는 게 황송했던 나는 "저 괜찮아요. 하나도 아프지 않아요." 하고 손사래를 쳤다. 간호사가 다가와 장갑을 벗기자 손을 치료해주려는 줄 알고 주먹을 꼭 쥐고 버티기까지 했다. 단지 바늘구멍만큼 뚫렸을 뿐인데…….

그때 4년차 레지던트가 한심하다는 듯이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뭐? 너 때문인 줄 알아? 네 뚫어진 장갑에서 세균이 나오잖아. 환자한테 염증 생기면 네가 책임질래?"

"…………"

그 무안함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수술용 장갑은 의사보다 환자를 보호하려고 끼는 것인데 나는 어찌 내 위주로만 생각했던 것일까? 살면서 이렇게 나를 위한 일인지, 상대를 위한 일인지 모르며 저지르는 일이 생길까봐 나는 지금도 두렵다.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