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진기 받고 싶지 않은 인사
청진기 받고 싶지 않은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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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04.02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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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양(은혜산부인과의원)
김애양(은혜산부인과의원)

어여쁜 아가씨가 찾아왔다. 결혼을 한 달 앞둔 예비신부란다. 하늘거리는 치맛자락에 희망과 기대를 매달고 온 것 같았다. 화사한 얼굴빛에 들뜬 음성, 나긋나긋한 자태가 모두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요즘은 '웨딩검진'이 유행이다. 신랑과 신부가 결혼 전에 각각 병원을 먼저 들르는 것이다. 그녀도 산부인과 종합검사를 원했다. 초음파며 자궁암검사며 세균검사와 혈액검사 등등. 결과는 다 좋았는데 트리코모나스균이 검출된 점이 문제였다.

결과를 듣더니 그녀는 이마를 잔뜩 찌푸리며 불쾌감을 표현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몇 차례 반복하더니 화까지 내기 시작했다. 최근 잠자리를 갖고 나서 거북하긴 했지만 약혼자가 균을 옮겨다 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트리코모나스란 질염의 원인균으로서 성 접촉으로 감염된다. 아메바와 같은 원충류이기 때문에 더러 수영장이나 사우나에서 옮기도 하지만 성병균으로 분류되어 있다.

이 균에 걸리면 여성에선 녹황색 분비물이 흐르고 악취가 나고 자궁암이 초래되는 반면 남성은 아무 증상이 없기 때문에 여성들만 골탕 먹기 일쑤이다.

그동안 트리코모나스 감염 환자를 여럿 보았지만 유독 그녀만 나를 힘들게 했다. 곤혹스런 질문 공세를 퍼붓는 것이었다. 약혼자를 만나 5년 동안 단지 다섯 차례 관계를 맺었단다.

그만큼 남자는 자신을 사랑해주고 아껴준다나? 그 남자는 사랑의 정신적인 면을 존중하고 육체적인 부분은 멸시하는 고상한 사람이므로 절대 성병 따위에 걸릴 수가 없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날마다 인터넷에서 각종 그릇된 정보를 적어 와서는 집요하게 대답을 요구했다. 특히 성관계가 아닌 다른 경로로 옮을 수 있는 가능성을 묻고 또 물었다. 나야 검사 결과만 알려줬을 뿐인데 마치 불행을 선고한 것처럼 과하게 반응하는 그녀가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신혼의 환상에 들떠있는 그녀에게 몹쓸 짓을 한 것만 같았다. 이 병이 워낙 흔하다든가, 남자들은 원래 믿을 수 없는 법이라든가,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의 병원균조차 포용하라든가 하는 나의 의견은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자신 이외에 다른 여자와 관계가 있었다면 명백한 배신이고 용서받지 못할 죄악이라며 그녀는 진한 눈물을 보였다. 닷새간의 통원치료 기간 동안 그녀의 고통이 내게 들러붙어 제발 치료받으러 오지 않기를 기도할 지경이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그녀가 다시 나타났다. 트리코모나스가 완전히 없어졌는지 재검받기 위해서였다. 한달 전 울고불고 할 때와는 달리 객쩍은 미소를 짓기에 잘 지냈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그녀는 기운차게 대답했다. 싹 해결했노라고.

결혼을 취소하느라 많은 위약금을 물었단다. 예식장이며 기념촬영이며 신혼여행까지. 정신적인 사랑을 주장하던 남자에게서 복잡한 여자관계가 밝혀져 파혼하기가 퍽 쉬웠다고 했다.

병균 덕분에 상대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으니 균을 발견해 준 내게 감사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차라리 날 원망하면 한결 마음이 편하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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