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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일곱 개의 칼자국
청진기 일곱 개의 칼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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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03.05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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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양(은혜산부인과의원)
▲ 김애양(은혜산부인과의원)

넉넉한 풍채에 인상 좋은 아주머니가 내원했다. 이웃 건물에서 청소용역을 담당하는 분이다. 수년 째 갱년기 호르몬제를 복용 중이다. 언제나 밝게 웃으며 방문하던 아주머니가 이번엔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두 달 동안 하혈이 계속된단다. 폐경기 이후의 자궁출혈은 요주의 증상이다.

젊은 여성들이야 부정출혈이 다반사이지만 연세 드신 분들의 경우는 반드시 악성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초음파 검사를 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자궁내막이 비정상적으로 두터워져 있었다. 소파수술을 통한 조직검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아주머니에게 설명을 드렸더니 보호자를 데려오겠다며 나갔다.

잠시 후 앳된 아가씨가 들어섰다. 아주머니의 막내딸이라는데 나를 바라보는 눈길이 예사롭지 않았다. 형형한 눈빛이 꼭 내 머릿속을 뚫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아무 것도 들으려 하지 않고, 묻지도 않더니 선뜻 수술승낙서에 서명을 했다.

수술은 이내 끝났다. 수거한 조직들을 검사실로 보냈는데 아마도 자궁출혈의 가장 흔한 원인인 용종(茸腫, polyp) 같았다. 환자를 옮기자마자 모녀를 만나러 회복실로 갔다. 아주머니의 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 견딜 수 없었다. 그만큼 아가씨의 태도에는 호기심을 자아내는 구석이 있었다.

그녀는 내게 대뜸 웃옷을 걷어 올려 배를 내보였다. 거기엔 누군가가 난도질을 한 듯이 일곱 개의 칼자국이 남겨져 있었다. 개복수술을 받은 흉터였다. 처음 수술을 받은 것은 스무 살 때란다. 어느 날 배가 아파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병원에 실려 가니 원인을 찾으려면 배를 가르자고 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선 일단 개복부터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뱃속에선 아무런 병변을 찾을 수 없었다. 이런 통증은 발작적으로 재발했다. 병원을 전전하며 응급 수술을 받은 것이 일곱 차례로 이어졌다. 마지막 수술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그것이 무병(巫病)임을 알게 되었다.

그녀에게 장군신이 내렸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어떻게 해서든지 무병에서 헤어나게 해주려고 집 한 채 값을 들여 굿을 했건만 불가항력이란 걸 깨달았다. 지금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도리어 남을 위한 굿을 하며 살고 있단다.

가족과 떨어져 지내도 어머니가 아프단 걸 이 딸이 먼저 알았고 또 수술을 받으리란 것도 훤히 꿰고 있었다는데 그녀는 내 얼굴을 깊숙이 응시하면서 힘든 일이 생기면 찾아오라고 명함을 한 장 건넸다.

평소 방송에서 무속신앙이나 엑소시스트 등등이 나오면 귓등으로만 스쳐 듣던 나로서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현대의학이 인체의 신비를 속속 밝혀내는 이 마당에 의사로서 이 아가씨의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눈앞에 펼쳐 보인 일곱 번의 칼자국을 어찌 이해해야 할까? 세월이 더 흘러 내 아무리 명의가 된다 해도 세상에 숨겨진 초자연적 힘까지 모두 안다고 말할 순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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