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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민 우울증 검사 논란...외국은 어떻게?

전국민 우울증 검사 논란...외국은 어떻게?

  • 이석영 기자 lsy@doctorsnews.co.kr
  • 승인 2012.02.28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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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약물 남용 우려, 미·영·캐나다 엄격히 제한
"정확도 50% 불과...환자·국가 모두에 해로워"

전국민을 대상으로 우울증 등 정신건강 검진을 실시한다는 정부 계획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고 있다.

시민단체는 환자의 인권침해 문제를 강하게 제기하는 반면 학교폭력과 왕따, 인터넷 중독 현상에 민감한 학부모단체는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다. 의료계 내부에선 정신과·가정의학과 등 전문과목별로 우울증 스크리닝의 장단점에 대해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한의사들까지 국가 정신검진 사업에 자신들도 끼워달라며 밥숟가락 얹기에 분주하다.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 우울증 환자의 지속적인 증가 등 나름 이유있는 배경을 등에 업고 야심차게 '전국민 정신건강검진 사업'을 공언한 정부는 예상치 못한 논란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우리보다 정신의학 분야에서 몇 발짝 앞서가는 외국의 경우는 어떨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세계적으로 전국민 정신질환 선별검사를 국가가 나서 제도화 하고 권장하는 나라는 한 곳도 없다.

미·영·캐나다 엄격한 제한 속에서만 허용
국내 의료윤리 분야 학회 등에 따르면 세계 모든 나라가 1990년대 까지 일차진료에서 우울증 스크린을 권장하지 않다가 2002년 미국, 2005년 캐나다에서 정신과 전문의가 참여하는 상황에서만 검진할 것을 권장했다.

미국은 2009년부터 선별검사의 요건을 더욱 엄격히 제한해 정신과적 분석·치료·추적 까지 가능한 경우에만 우울증을 스크린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들 국가에서 채택하고 있는 우울증 선별검사 시행 원칙은 다음과 같다.

△우울증이 충분히 높은 빈도를 보이고, 매우 중요한 사회적 문제일 경우 △스크린이 없으면 우울증 환자를 선별하기 어려울 때 △발견된 우울증 환자가 제대로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제도적 뒷받침이 마련됐을 경우 △선별방법이 정확하고 위양성이 의미있게 적을 때 △선별검사가 환자에게 해악보다 이익이 확실히 커야 하고 △무작위 비교 임상시험(RCT) 결과를 통해 충분히 근거를 가져야 함.

잘못 진단할 확률 50%...득보다 실 많아
영국 국립의료원(NHS) 산하 국립임상보건연구원(NICE)은 2010년 이 같은 원칙을 바탕으로 우울증 선별검사의 무용론을 제기했다.

우선 정형화된 문진표를 통한 단순한 우울증 선별검사는 위양성률, 즉 우울증이 없는데도 있는 것으로 결과가 나오는 경우가 무려 50%에 이른다는 사실을 꼽았다. 자칫 환자가 아닌 사람이 우울증 치료약을 복용하게 될 위험성이 큰 것이다.

또 스크린으로 선별되는 환자 대부분은 증상이 미약한 경우라는 점도 지적됐다. 경증 우울증은 치료가 필요한 질병이라기 보다 생활양식의 변화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소위 '삶의 문제'인데, 선별검사를 통해 우울증환자로 분류될 경우 고비용·전문인력이 동원되어 불필요한 의료자원이 낭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또 다른 사회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정상적인 사람도 '내가 혹시 우울증 환자가 아닐까'하는 근심에 휩싸이게 하는 이른바 '노시보 효과'(nocebo effect)로 인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행동하기 보다 약을 먹고 고통을 잊으려는 부정적인 삶의 패턴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영국 NHS는 "우울증 선별검사가 환자에게 이익을 준다는 근거의 거의 없다"고 결론내리고 일차진료에서 정신건강 스크리닝을 하지 말 것을 권고 하고 있다. 우울증이 의심되면 개별적으로 면담하고, 필요한 경우 정신과에 의뢰하라는 것이다.

미국의 보건당국 역시 전국민 스크린을 통한 우울증 검사가 해 보다 이득이 클 것이라는 근거는 없다는 방향으로 결론짓고 있다.

"중증정신질환자 역차별 우려 커"
최보문 한국의료윤리학회장(가톨릭의대)은 "영국의 경우 1차 진료의사(primary doctor)가 우울증이 의심되는 환자를 개별적으로 상담하고, 필요한 경우 정신과로 전원조치 하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다"며 "심지어 병원에 온 환자들에게도 정형화된 스크린 검사(routine screen)는 하지 말것을 권고 하고 있다"고 밝혔다.

특히 중증 정신질환자가 전국민 정신건강검진 제도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최보문 한국의료윤리학회 회장
최 교수는 "스크린으로 걸러지는 대부분 경우가 가벼운 우울증 환자라는 사실은 고학력의 많은 경험을 가진 전문가가 경증 환자에게 투입될 가능성을 말해 준다"며 "이는 전문가의 치료가 가장 절실한 중증 정신질환자들이 상대적으로 적은 관심과 투자를 받게되는 현상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의료자원 사용의 효용성 측면에서 득보다 실이 많으며, 의료자원의 공정한 배분 원칙에서 볼 때도 비윤리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 비전문가가 우울증 선별 과정에 개입하는데 따른 위험성도 경고했다. 전국민 정신건강검진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검사결과 의양성으로 나온 사람을 선별해 정신과로 보내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상담과정을 별도로 만들어야 하고 수많은 상담사를 채용·운용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환자 한 명이 정신과로 들어가는 과정을 통제하는 게이트 키퍼(gate keeper) 역할을 의사가 아닌 비전문가의 손에 맡겨야 하는 상황이 나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최 교수는 정부의 방안에 대해 "과학적 근거도, 철학도 없는 '언발에 오줌누기식' 정책"이라고 꼬집었다.

보건복지부는 의료계 등 사회 각계 의견수렴을 거쳐 오는 4월까지 정신건강검진 종합대책을 수립할 계획이다. 이보다 앞서 대한의학회는 의료계 내부 의견을 수렴·조율하는 공청회·토론회 등 자리를 조만간 마련할 것으로 보여 뜨거운 논쟁이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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