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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내가 사과를 먹지 않게 된 이유

청진기 내가 사과를 먹지 않게 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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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01.06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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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양(은혜산부인과의원)

▲ 김애양(은혜산부인과의원)

어릴 땐 사과 때문에 우쭐해진 적이 많았다. 사과를 잘 깎았던 덕분이었다. 껍질을 얇게 깎는 재주도 있었지만 손님상 접시에 예쁘게 진열하는 솜씨를 발휘했다.

사과를 6등분 한 다음 토끼 귀 모양으로 빨간 껍질을 남겨놓으면 더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벗겨진 사과는 쉽게 변색되었으므로 살짝 소금물에 담갔다 꺼내는 과정도 잊지 않았다. 과일 접시를 들고 손님 앞에 나가면 보는 이마다 칭찬을 하며 이담에 시집가서 잘 살겠다고 덕담을 건넸다.

뿐만 아니라 나는 맨손으로도 사과를 잘 잘랐다. 꼭지가 달린 윗부분에다 손톱으로 금을 내고 엄지에 힘을 주어 가르면 절반이 나뉘었다.

또다시 반으로 나누면 균등하게 4조각이 되므로 칼이 전혀 필요치 않았다. 사과를 손으로 잘 자르면 연애를 잘한다는 말을 듣고 실력을 연마했는지도 모른다.

무기질이 많은 사과는 '아침에 먹으면 금, 점심엔 은, 저녁엔 동'이라고 해서 아침밥 대용으로 먹고 나서기도 했다. 요즘은 치매를 예방하는 물질이 들어 있다고 사과예찬이 더 커졌지만 사과가 느닷없이 싫어진 건 10년 전이다.

개원 초엔 점심시간을 따로 정하지 않고 환자를 보곤 했는데 식사 중에 젊은 남녀가 다급하게 병원에 들어섰다. 스키장에서 오는 길이란다. 초보자인 여자가 스키를 타고 높은 곳에서 하강하다 나무에 부딪혀 외음부가 몹시 아프다고 했다. 중요한 곳을 다친 것 같다고 걱정이 한가득했다.

진찰을 받기위해 그녀가 옷을 벗기 시작했을 때 간호사와 나는 저도 모르게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진찰실 가득 악취가 풍겼기 때문이다. 여성에게서 질염이 심한 경우 생선 썩는 냄새가 난다고 표현하지만 그녀의 경우 그 말로는 부족했다. 수족관의 모든 물고기가 동시에 썩으면 그런 냄새를 풍길까?

스키를 타다 다친 곳의 상처는 대수롭지 않았다. 불두덩에 생긴 혈종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의 염증은 예사롭지 않았다. 악취를 일으키는 원인균은 임질과 트리코모나스, 헤모필루스 등등인데 이 모든 세균이 죄다 검출될 성 싶었다.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염증이 이렇게 심한데 남자 친구가 뭐라고 하지 않나요?"
그러자 그녀가 눈을 깜빡거리며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아, 저요? 저한테서 사과향기가 난대요."

페로몬과 질병의 냄새를 구별 못하는 청춘남녀가 참으로 어처구니없었던 그날부터 나는 사과가 먹기 싫어졌다. 사과를 떠올리면 냄새가 주는 폭력성을 느낀다고 할까? 우리의 오감 중에서 후각이 가장 기억과 직결된다더니 정말 그 일은 영영 잊히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난동을 피울 때 달걀과 함께 액젓을 투척하는가 보다. 새해엔 모쪼록 향기 나는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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