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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24-04-18 11:19 (목)
청진기 하늘 그리고 땅

청진기 하늘 그리고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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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1.12.12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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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양(은혜산부인과의원)

▲ 김애양(은혜산부인과의원)

하늘은 높고 땅이 낮음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공자가 주역을 쉽게 풀이한 계사전(繫辭典)도 천존지비(天尊地卑)란 말로 시작된다. 여기에다 남자를 하늘에, 여자를 땅에 대입해서 여자를 비하하는 데 쓰이기도 하지만 실제는 인간에게 하늘은 존엄하고 땅은 가깝다는 뜻이란다.

그러면 높은 하늘은 어떻게 바라볼까? 그야 어깨를 펴고 허리를 세우고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다. 반대로 낮은 땅을 보려면 어떻게 하나? 허리를 굽히거나 고개를 숙이고 두 눈을 아래로 향하면 보일 것이다.

그런데 실상은 어떠한지?

사람들은 높은 권력 앞에서 허리를 잔뜩 구부리고 고개를 조아린다. 반대로 자신보다 낮다고 여겨지는 존재 앞에선 턱을 쳐들고 눈을 내리깔며 멸시의 시선을 보내기 십상이다. 이런 모습은 진료실에서도 자주 본다.

남편이 큰 사업체를 경영한다는 K여사의 경우, 내원하는 순간부터 대기실이 소란해진다. 자신은 중요한 여성단체모임에 가야 하므로 진료실에 당장 들어가겠다고 수선을 피운다.

잠시 원장 얼굴만 보고 오로지 한 가지만 물어보고 나올 것이라 말한다. 만류를 하는 간호사와 대기 환자 여럿을 제치고 K 여사는 내게 진군하듯 달려온다. 칠순이 넘었건만 외모로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다. 지난번보다 주름이 부쩍 줄어 몇 년 더 젊어진 얼굴이다. 여사의 내원목적은 다양하다.

대학병원에서 손등에 난 사마귀를 떼어 조직검사를 했으니 그 실밥을 풀어달라거나, 갑상선약과 혈압약의 장기 처방을 해달라느니 혹은 얼굴에 맞은 필러가 덧났다며 염증을 예방하는 주사를 놔 달라는 요구 등등이다. 죄다 내 진찰소견과 상관없는 일방적인 그녀의 지시일 따름이다.

흔히 의사는 갑(甲), 환자는 을(乙)의 위치에서 진료가 이루어진다고 의료현실을 비판하곤 하지만 K여사 앞의 나는 '갑'은커녕 부하직원 정도의 취급을 받는다. 고압적인 태도와 명령조의 말투에다 끊이지 않는 이야기의 폭포가 이어진다.

유명대학병원 모과장과 함께 골프를 치는 사이라는 둥, Z의료원 노화방지 클리닉에 등록하여 거액의 선금을 지불해두었다는 둥. 그토록 아는 의사가 많은데 왜 하필 내게 와서 일할 의욕을 떨어뜨리는지 따지고 싶은 심정이 된다.

그런 K여사도 대학병원에 가면 공손하게 굴겠지. 자신보다 강자라고 생각하는 이들 앞에선 바짝 꼬리를 내리겠지….

어쩌면 나 또한 그런 게 아닐까? 처지가 곤궁한 환자 또는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 다문화가정의 환자가 오면 상대적으로 덜 친절하게 대하는 건 아닐까? 우리 병원엔 내 마음에 쏙 드는 환자만 내원하기를 바라는 건 아닐까? 잠시 내 얼굴만 보겠다더니 10여분도 넘게 장황한 연설을 늘어놓은 K여사가 드디어 나간다.

모쪼록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 살피는 자세로 진료를 해야 한다는 걸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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