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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처방전마저도

청진기 처방전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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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1.10.14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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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양(은혜산부인과의원)

▲ 김애양(은혜산부인과의원)

정직함을 생각하면 내 머릿속에는 가방 하나가 떠오른다. 40여 년 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언니가 전해 준 이야기이다.

언니는 짐 가방을 여럿 꾸려 미국 땅에 내렸다. 그런데 집에 도착해서도 며칠이 지나서야 짐이 모자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단다. 근 일주일 만에 부랴부랴 공항으로 가보니 이민 가방 하나가 여전히 주차장에 서 있더란다.

그때가 1970년 대였으므로 우리나라는 '소매치기 조심' 같은 구호가 공공연하게 나붙던 시절이었다. 언니는 역시 선진국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고 감격해마지 않아 우리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제 것이 아닌 물건에는 절대로 손대지 않는다는 그 나라가 남에게 무관심하고 극도의 개인주의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정직한 사회를 대변하는 것 같았다. 그 때부터 부주의로 물건을 흘리거나 잃어버릴 때마다 너른 주차장에 홀로 서 있었다는 언니의 이민가방이 생각나곤 했다.

이번에도 그 가방을 떠올릴 일이 생겼다.

여름휴가라고 광복절을 포함하여 삼 일간 쉬다 온 다음날이었다. 그동안 용지가 부족해서 전송을 참고 있던 팩시밀리가 한꺼번에 밀린 문서를 토해냈다. 요즘엔 팩스로 들어오는 내용이 광고 일색이라서 눈 여겨 보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아주 이상한 처방전이 눈길을 끌었다.

우리 병원의 처방전이건만 거기엔 내가 모르는 약물이 적혀 있었다. 내 이름과 면호번호 뿐 아니라 도장까지 희미하게 찍혀있어서 그럴싸했지만 결코 내 손을 거친 것은 아니었다. 귀신이 곡을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내가 써준 처방전이 아닌데 내 것이라니…….

진료실이 뱅그르르 도는 것도 같고 정말 내가 맞는지 아닌지 잠시 나의 정체를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지목받을 때의 억울함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내가 휴가 간 날, 누군가가 내 명의로 처방전을 작성하여 약을 구입한 것이었다. 비만치료제로 쓰이는 향정신성 약물이라는데 공교롭게도 약국에 그 약이 없었기에 대체 약을 쓰면서 내게 팩스를 보내 준 것이었다.

그렇다면 의사가 없어도 얼마든지 약을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세상이 오려는 것 같았다.

사실 처방전 서식은 컴퓨터로 다운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누군가 마음만 먹으면 이런 위조처방전은 쉽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의약분업의 폐단이 이렇게도 나타나는구나 싶어 머리가 아팠다. 다른 의사들도 이런 경험이 있는지 의사회에 문의했다. 없다고 했다. 결국 경찰서에 신고를 했다. 경찰이 연결해 준 그 환자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세상이 온통 짝퉁 천지인 마당에 처방전 좀 위조하는 게 뭐 그리 나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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