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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안도의 빛깔

청진기 안도의 빛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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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1.09.19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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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양(은혜산부인과의원)

▲ 김애양(은혜산부인과의원)

낮게 드리운 구름이 좀처럼 걷히지 않는 여름날이었다. 맑은 날이 언제였는지 가물거리도록 쉬지 않고 비가 내렸다. 번갯불과 우렛소리에 와락 하늘이 무섭기도 했다. 엄청난 수해소식으로 걱정과 안타까움이 이어졌다. 높은 습도는 사람을 유난히 지치고 또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그 날씨만큼 시무룩한 표정의 남자가 진료실에 들어섰다. 삼십대의 평범하고 수수한 외모였다. 그는 대뜸 책상 위에 조심스레 가족관계증명서와 신분증을 내밀더니 환자의 남편이라고 했다.

6개월 전에 아내가 우리 병원에서 임신중절수술을 받았을 텐데 그때 수술서약서에 서명한 남자가 누구였는지 확인을 요구했다. 면전에서 아내의 외도를 인정하니까 듣기에 민망했다. 오쟁이 진 남편이라니 어쩐지 이마에 뿔이 돋은 것처럼 희극적으로도 보였다.

일단 환자와 동행하지 않는 한 병원에서는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노라고 그의 말을 잘랐다. 환자의 프라이버시 보호가 최우선이고 당사자의 승낙 없이는 그 누구에게도 공개가 불가능하다고 단호하게 거절을 했다.

그 남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미 변호사에게 자문을 구한 바 자신은 알 권리가 있고 의사는 요구에 응할 의무가 있다며 협조를 종용했다. 또 오죽하면 회사에 휴가를 내고 직접 찾아왔겠느냐면서 도와달라고 통사정이었다.

아내는 외국 출장 중이라고 했다. 우편물을 열어보다가 신용카드 내역서 중에 산부인과에서 6개월 할부로 결제한 금액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아내에게 국제전화로 무슨 진료를 받은 거냐고 물었더니 웃기만 하고 대답을 못하는 점이 수상쩍기 그지없다고 했다.

그만한 액수는 임신중절이 틀림없다며 자신이 모르게 진행된 점으로 미루어 필경 다른 사내가 남편 행세를 했을 거라고 단정했다.

나에게 해코지를 하려는 것이 아니니 차트를 보여 달라고 애원하다시피 졸랐다. 세 살배기 딸아이가 있는 데도 출장이 빈번한 아내에게 직장을 관두도록 하려는 것이 목표이며 가정을 파탄 내지 않을테니 안심해도 된다는 회유도 했다.

양미간에 땀을 흘리며 간곡하게 사정하는 남자의 말을 듣다보니 나도 환자에게 속은 것 같아 은근히 부아가 나기 시작했다. 병원에서야 아무 남자를 데리고 와도 남편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요즘처럼 중절수술이 법으로 금지된 마당에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의아한 나는 환자의 차트를 살짝 열어보고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 날짜에는 보톡스 시술 기록만 적혀 있을 따름이었다. 본디 예쁜 얼굴인데도 더욱 갸름해 보이고자 양쪽 턱에 보톡스를 주입받고 또 미간과 눈가에도 잔뜩 주사를 맞았던 그 환자의 애교스런 모습이 비로소 기억났다.

나는 기꺼이 보호자에게 차트를 펼쳐 보여주었다. 거기에서 아내의 얼굴 모양과 보톡스 시술 지도를 발견한 그의 얼굴은 삽시간에 밝아졌다. 공연한 의심이 걷히는 순간 그를 스치는 안도의 빛깔은 장맛비 쏟은 후의 파아란 하늘과 똑같았다.

이젠 청명한 저 가을 하늘을 올려다볼 때마다 "의심이란 저절로 배고 저절로 태어나는 괴물"이라는《오델로》의 대사가 생각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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