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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무거운 숨결

청진기 무거운 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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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1.07.22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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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양(은혜산부인과의원)

▲ 김애양(은혜산부인과의원)

나는 정말 인형이 걸어 들어오는 줄만 알았다.

"끓는 타르처럼 까만 눈, 밤처럼 검은 속눈썹, 부드럽게 홍조를 띤 볼, 가는 허리"……

러시아 작가 이반 부닌의 단편소설 <가벼운 숨결> 중에 나오는 아름다운 여인의 조건과 모두 부합되어 보였다. "평균보다 긴 팔, 작은 발, 적당히 큰 가슴, 적절한 종아리 곡선, 조개 색 무릎, 비스듬한 어깨선."

단지 가벼운 숨결만이 해당되지 않았다. 얼굴에 잔뜩 불만을 담은 중년여인에게 끌려오다시피 진료실에 들어선 그녀는 긴장한 나머지 불규칙한 숨을 쉬고 있었다.

투명한 피부가 외국인임을 말해주었지만 너무 예쁜 나머지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것만 같았다. 도무지 환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내게 함께 온 부인이 설명을 시작했다.

키르키즈스탄 출신의 그녀를 국제결혼소개소를 통해 아들과 혼인시켰는데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고 온종일 방에만 틀어박혀 있어 답답하기 짝이 없다고 했다.

빨리 아이나 낳아 주었으면 좋겠는데 3개월이 넘도록 소식이 없을 뿐 아니라 자꾸 부부관계를 피하려고만 하니 산부인과적으로 이상이 있는 게 아닐까 의심이 되어 데리고 왔다는 것이었다.

"즈뜨라스뜨뷔이쩨!"

나는 유일하게 아는 러시아어로 인사를 건네 보았다. 그러나 발음이 나빠서인지 그녀는 멀뚱멀뚱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나는 거의 원시인처럼 손짓 발짓을 동원해 그녀를 진찰대위에 눕혔다. 내진을 하고 초음파 검사도 했지만 아이를 갖는 데의 문제점은 발견하지 못했다.

단지 잦은 잠자리 때문인지 하얀 피부가 빨갛게 부어 아파보였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 1339에 전화를 해보았다. 요즘은 1339만 누르면 외국인 환자를 통역해주는 서비스가 제공되고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영어, 중국어, 일본어만 해당된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그녀의 흰 손을 잡고 눈빛으로만 전했다. 모든 것이 정상이라고, 걱정하지 말고 기운을 내보라고……. 그녀는 무거운 한숨을 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해도 그녀의 시어머니는 쉬지 않고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결혼소개비가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른다, 머리가 좋았던 아들이 열 살 때 열병을 앓은 후유증으로 정신지체자가 되지 않았더라면 자신도 외국인 며느리를 얻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형적인 모계사회인 키르키즈스탄의 여자는 절대로 아이를 버리고 떠나지 않는다고 해서 선택했는데 말이 안 통해 죽을 지경이라는 이야기였다.

바라볼수록 예쁜 그녀에게 왜 그렇게 측은한 생각이 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 언니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보다 10살 이상 나이가 많은 두 언니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취업이 쉬웠던 미국으로 건너갔다.

코리아란 나라가 어딘지 모른다고 해서 번번이 세계지도를 펼쳐 보이며 설명하였다는 언니들은 이역멀리 객지에서 얼마나 무거운 숨을 쉬며 살았을까? 그렇게 독일로는 광부와 간호사가, 중동으로는 건설기술자들이 넘어가서 오늘날의 우리나라가 있게 된 것일테지.

이젠 동계올림픽을 유치할 정도로 국력이 커진 때에 이 땅에 사는 외국인에게 더 많은 애정을 기울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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