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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의료복지 유토피아는 없다

청진기 의료복지 유토피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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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1.07.15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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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호진(충북 청주·서울아동병원 내과)

▲ 박호진(충북 청주·서울아동병원 내과)

삼국지를 보면, 제갈공명이 칭병(稱病)하거나 와병(臥病)으로 입조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 당시에도 질병상태는 결근을 정당화하는 일종의 면죄부였던 셈이다.

요즘도 몸이 아파 학교에 결석하면 진단서를 제출하여 무단결석의 불이익을 면제받는다. 꾀병은 물론 아니고, 나아가 자기 병에 대한 주관적 해석을 객관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서구에선 객관적 병을 'disease', 주관적인 것을 'illness'라 한다. 한국에선 병·질병·질환 등을 같은 뜻으로 혼용한다. 인류학이나 사회학에선 구분하여 의미를 달리 쓴다.

'sickness'란 개념도 있다. 누가 아파서 결근하거나 일의 능률이 떨어지면 직장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 누군가는 그 사람의 일을 대신해주어야 한다. 이럴 경우 개인의 아픔은 사회적 성격을 갖는다. 이걸 개념화한 사람은 사회학자 탤컷 파슨스이다.

그는 1951년 역저인 <사회체계>에서 아픈 사람(sick person)을 사회학 이론으로 체계화했다. 그들은 "정상적인 사회적 역할을 면제받고, 그가 처한 상황에 책임이 없다. 그러나 치유를 위해 반드시 노력해야 하고 전문적인 자문 즉 의사와 협조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면, 죄수가 병으로 형집행정지를 받는다. 그의 사회적 역할 즉 수형(受刑)을 일시 면제하되 꾀병을 막고 전문치료를 위해 병원으로 주거를 제한한다. 학생이 결석계를 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파슨스는 환자 본인의 치유노력을 전제로 삼았다. 맞는 얘기다! 나의 아픔을 남이 대신해줄 수 없으니 스스로 노력을 다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투병(鬪病)이란 말은 아주 적절하다. 이걸 전제로 환자에게 면책이라는 부차적 이익(secondary gain)을 주는 것이다.

투병은 일차적으로 개인의 영역이고 책임이다. 절주·금연·운동·식이 등을 스스로 관리해야 한다. 내 병을 잘 볼 의사를 찾아, 예약된 날짜에 병의원에 가야하고, 시간에 맞추어 약을 먹는다. 개인 사정에 따라 다르겠지만 다른 일을 제치고 치료에 우선순위를 주어야 한다.

필자도 하루 3∼4회 약을 먹어본 적이 있다. 복약이 생각보다 번거롭고 빠뜨리기 일쑤였다. 아무리 아파도 부지런해야 치료효과를 볼 수 있다. 가만히 아랫목에 드러눕는 와병으로 해결되는 일이 아니다.

최근 일부에서 '주치의등록제'를 주장하고 있다. 정부 당국도 신중히 고려중인 모양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와병, 칭병만 하면 국가와 의사가 합심하여 병을 고쳐주는 '의료복지-유토피아'로 알고 있다.

의료보장이든 복지든 개인의 투병의지를 약화시켜선 안 된다. 자칫 돈은 밑 빠진 독에 물붓기고 그나마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건강권 보장은 질병의 예방과 치료 등 범위가 대단히 넓다. 국가는 공해·상하수도·식품·건강교육 등 예방에 주력해야 한다.

대형 재난이나 전염병의 창궐도 개인들이 대처하기 어렵다. 질병치유의 사회적 대처는 전국민건강보험의 시행과 재원의 사회적 조달로 충분하다. 모든 사람이 강제가입하고, 소득에 따라 보험료를 더 많이 매기기 때문이다.

먹고 사는 게 바쁘다 보니 의사나 간호사가 항상 옆에 있어주길 바라기 쉽다. 전화 한 통에 의료인이 총알 같이 달려와 해결해주면 제일 좋을 것이다. 이 세상에 그런 유토피아는 없다. 건강권 보장의 제도적인 틀을 만들어주면 그다음부턴 본인들이 알아서 해야 한다.

건강은 누구에게 맡기는 게 아니다. 내 품을 팔아야 한다. 남들이 환자를 이해하고 도움을 줄 수 있지만 해결해주는 게 아니다. 권리 위에 누워있으면 사자도 굶는다고 하지 않는가?

주치의등록제는 요술지팡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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