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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처

톨스토이의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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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1.05.27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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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이혁(대한의사협회 고문 세계결핵제로운동본부 총재)

레프 톨스토이(Lev Nikolaevich Tolstoy, 1828-1910)는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 문호임과 동시에 문명비평가·사상가로서도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의 작품 '전쟁과 평화'(Voina i mir, 1864-1869), '안나 카레니나'(Anna Karenina, 1873-1876) 등은 세계의 지식인들이 즐겨 읽었던 불후의 명작들이다.

그러나 이 작품들이 나온 무렵부터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에 대한 무상(無常)에 대해 심한 정신적 동요를 일으켜, 과학·철학·예술 등에서 그 해답을 구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마침내 종교에 의탁했다. 이때가 그의 전향기여서 새로운 관점에서 많은 작품을 냈다.

그의 사상은 타락한 그리스도교를 배제하고, 투철한 원시 그리스도교에 복귀해 간소한 생활을 영위하고 악에 대한 무저항주의와 자기완성을 신조로 하여 사랑의 정신으로 전 세계의 복지에 기여하려는 것이었다. 1885년에는 사유재산을 부정했으며, 이 문제로 부인과 충돌했다. 그 후 일체의 저작권은 부인이 관리했다.

그는 러시아 정교회에 속하지 않는 성령부정파교도(聖靈否定派敎徒)와 친교가 있었으며, 4000명에 달하는 이교도들을 미국에 이주시키기 위한 자금을 조달할 목적으로 장편소설을 발표했는데 이것이 유명한 '부활'(Voskresenie, 1899)이다.

'부활'에서 동방정교회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1901년 종무원에서 파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 후에도 그는 많은 작품과 논설을 발표했다.

톨스토이는 만년에 종교에서 구제를 받으려고 했다. 사유재산과 성욕을 부정하고, 순결을 내용으로 하는 작품을 썼을 때부터 부인 소피아와의 사이가 험악하게 됐다. 톨스토이의 사상의 변화에 대해 소피아는 배신자로 생각했던 것이다.

남편의 소설을 청서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남편이 문호로서 명성을 떨치는 것을 기뻐했던 소피아는 남편이 소설로부터 이탈하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톨스토이는 62세경부터 변했고, 소피아는 50세경부터 히스테리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어쨌든 몇 차례 가출을 계획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침내 1910년 10월 29일 이른 아침 장녀와 주치의를 데리고 집을 떠나 방랑의 여행길로 오른 톨스토이는 도중에 병을 얻어 아스타포보(현 톨스토이역)의 역장관사에서 사망했다. 1910년 11월 20일 82세의 나이로 저 세상으로 간 것이다. 대문호로서는 비참한 죽음이었다.

소위 '세계의 3대 악처'라는 말이 있다. 첫째는 소크라테스의 처 쿠산티페, 둘째는 모차르트의 처 콘스탄제, 셋째는 톨스토이의 처 소피아를 들고 있다.

소크라테스(BC 470-BC 399)의 처 쿠산티페는 대표적 악처로 되어 있는데, 소크라테스에게 구정물을 퍼부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모차르트(1756-1791)의 처 콘스탄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말이 있다.

쿠산티페의 일화를 소개한다. 소크라테스의 집에 많은 제자들이 찾아왔다. 항상 가르침을 받기 위해 소크라테스의 집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소크라테스의 처는 늘 이 일이 불만이었다. 그래서 남편에게 항상 투정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날도 많은 제자들이 소크라테스의 집을 찾아왔다.

늦은 시간에 소크라테스의 처는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소리를 지르며 늦은 시간에 손님을 데려오면 어떻게 하느냐고 야단했다. 제자들과 소크라테스는 쥐 죽은 듯이 듣기만 하였다.

한참 시간이 자나서도 크산티페는 성이 덜 풀렸는지 소리소리 지른 뒤 그릇에 물을 담아 소크라테스의 얼굴에 부어 버렸다. 악처 덕분에 소크라테스는 많은 곳을 방랑하며 사색에 열중했다는 설도 있다.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대주교 궁중악단의 바올리니스트이며, 작곡가이던 레오폴드 모차르트의 3남 4녀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의 천재적 재능을 보였던 모차르트는 이미 5세 때 소곡(小曲)을 작곡했다. 모차르트는 아버지와 함께 유럽 곳곳을 다니면서 음악 생활을 했다.

1782년에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수 알로이지아 웨버의 누이동생 콘스탄체와 결혼했다. 그는 '피가로의 결혼'(1786), '돈 지오반니'(1787), '마적'(魔笛, 1791) 등 여러 곡을 작곡했고, 교향곡 분야에서도 여러 곡을 발표했다.

그러나 차츰 아버지와의 불화가 생겼고, 낭비벽과 문란한 사생활 등으로 빚더미에 시달리는 등 빈곤한 삶을 살게 됐다. 1791년 건강이 악화된 그는 '레퀴엠'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 12월 5일 3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모차르트의 장례는 다음날 거행되었는데, 최후까지 유해를 따라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공동묘지에 매장되어 유해는 행방불명이 됐다. 부인 콘스탄체나 조객들이 묘지까지 따라가지 않은데 대해 악천후 때문이었다는 설과, 콘스탄체가 충격으로 실성했기 때문이었다는 설이 있다.

가난한 음악가의 삶에서는 양처보다 악처가 많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모차르트는 빚을 지고 살았지만 콘스탄체에게는 애정이 담긴 편지를 항상 썼다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악처는 남편이 만들어 낸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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