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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술이 석잔 뺨이 세대

청진기 술이 석잔 뺨이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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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1.04.24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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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양(은혜산부인과의원)

▲ 김애양(은혜산부인과의원)

월요일 아침, 첫 진료 환자로 한주의 운세를 가늠하게 된다. 금주엔 단발머리의 예쁘장한 아가씨가 처음으로 진료실에 들어섰다.

샛별같이 초롱초롱한 나이인데도 밤새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한 양 수심을 가득 담고 있었다. 찌푸린 양 미간의 걱정 보따리가 곧 터질 것만 같았다. 유방에서 뭔가 만져진단다. 엊저녁 목욕 중에 알게 되었다면서 조금씩 울먹거렸다.

진료과목들이 점점 전문화되어가면서 산부인과에서 유방을 멀리한 지 오래이다. 유방암 발생률이 점점 높아지는 반면 초기 진단은 상당히 어려운 마당에 어설프게 진찰하다가 놓치면 큰 낭패라는 것이 선배들의 지론이다.

하지만 이토록 시름 가득한 환자를 내몰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진찰대에 눕혀놓고 촉진을 해보니 그녀의 왼쪽 유방에서 만져지는 알맹이는 통통한 땅콩 알 크기였다.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으로 미루어 악성은 아닐 성싶지만 수술이 불가피해 보였다. 젊은 여성에게 많은 섬유성 낭종으로 짐작되었다. 차분하게 양성 종양이라고 설명해 주어도 그녀의 불안한 기색은 가시질 않았다.

"어떡하면 좋아요?" 다그치듯 묻기에 인근 외과를 떠올렸다. 한시바삐 그녀의 근심을 덜어주고 싶은데 종합병원에 간다면 예약에다 뭐다 또 여러 날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마침 우리병원에서 세 블록 떨어진 곳에 유방 전문 클리닉이 있었다.

원장님을 만난 적은 없어도 환자를 의뢰하면 득달같이 팩스로 결과를 알려주어 고맙게 기억되는 의원이었다. 서둘러 의뢰서를 작성하여 환자를 보냈다.

오래지 않아 그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알려 준 곳에 가 봤으나 병원이 없다는 것이었다. 불과 두 달 전에 그곳에서 유방암을 진단해 준 환자가 있었는데 나야말로 귀신에 홀린 것만 같았다.

얼른 확인하고 알려주겠노라 답하자마자 그녀의 낭랑한 음성이 내 귀를 울렸다. "선생님 때문에 불필요하게 시간과 돈을 다 없앴으니 택시비를 물어주세요."

결국 그녀는 우리에게서 얼마간의 돈을 받아갔다.

내겐 막내딸보다도 어린 아가씨가 이렇게까지 당차게 구는 것이 서운했지만 내심 부끄럽고도 미안했다. 그만큼 의사의 말 한마디가 중요한 것일 테지. 중신을 어찌했는가에 따라 술을 석잔 얻어먹거나 뺨을 세대 얻어맞는다는 옛말을 생각해봐도 소개의 책임이란 막중한 것 같다.

나중에야 그 유방암 클리닉은 지방으로 이전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말도 없이 사라진 병원 덕에 한 주일을 씁쓸하게 시작한 것이 억울했지만 나는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돌아다보면 내게 분에 넘치는 감사를 표현한 환자들, 해 준 것도 없는데 선물을 안겨 준 환자들이 훨씬 더 많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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