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을 위한 바른 소리, 의료를 위한 곧은 소리
updated. 2024-04-25 18:04 (목)
청진기 걸맞은 자리

청진기 걸맞은 자리

  • Doctorsnews admin@doctorsnews.co.kr
  • 승인 2011.03.25 10:55
  • 댓글 0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밴드
  • 카카오톡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인철(경기 안산 유소아청소년과의원)

▲ 유인철(경기 안산 유소아청소년과의원)

용문사 은행나무. 아시아에서 가장 큰 은행나무라는 사실은 차치하고라도 그 앞에 서면 까마득한 높이에 압도된다. 통일신라시대부터 우리 민족과 함께 했다는 역사성을 안다면 저절로 숙연해진다.

예로부터 은행나무는 느티나무와 함께 그냥 단순한 나무가 아니었다. 신이며, 역사이며, 고단한 삶의 동반자였다. 그만큼 고귀한 존재였기에 함부로 베면 재앙을 당한다고 여겼고 나무마다 한두 가지 신비스런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사람들은 전염병이 돌면 마을 어귀에 있는 신목(神木) 앞에서 고사를 지냈고, 자식이 없으면 1년이고 10년이고 치성을 드렸으며, 잎이 싹트는 모양에 따라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기도 했다. 오래된 은행나무는 보통 사찰이나 사당, 향교 근처에 있어 유교, 불교와 깊은 연관이 있음을 보여준다.

식물이건 동물이건 오랜 시간 진화를 거듭하면서 본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변해왔지만 은행나무는 대략 3억5천만 년 전인 고생대시기에 나타났음에도 처음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한다. 진화가 필요 없을 만큼 완벽하여 찰스 다윈은 은행나무를 살아있는 화석이라고 했다.

은행나무(Ginkgo biloba L.)는 흔하긴 해도 귀한 나무다.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생명력이 강하고 환경적응성이 뛰어나다. 살균, 살충성분을 가지고 있어 방제작업이 필요 없는 유일한 나무이며 옮겨심기도 수월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예로부터 잎과 열매는 물론이고 나무껍질이나 뿌리까지 민간 약재로 썼으며, 현대의학에서도 다양한 약리작용이 입증되었다.

은행잎은 건강 보조제이자 치료제이다. 푸른 잎을 차로 마시기도 하며 추출물은 약제로 개발돼 말초혈액 순환장애나 기질성 뇌기능장애의 예방과 치료에 사용된다. 열매는 호흡기 질환이나 전신피로 등을 개선해주는 건강보조 식품이며, 단백질·지방산·철분·비타민 등이 풍부하여 영양학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목재는 결이 곱고 광택이 나며, 터지거나 비틀림이 없어 절삭가공성이 우수하다. 고급가구재나 내장재, 바둑판, 칠기, 불교용품을 만드는데 주로 쓰인다. 특히 상을 만드는데 있어서는 최고의 재료로 은행나무상은 궁중에서 사용됐다.

비록 종족을 보존하려는 수단이겠지만, 은행나무의 골칫거리는 겉껍질에서 나는 고약한 냄새와 빌로볼(bilobol)이라는 물질에 의한 접촉성 피부염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사람들이 장대를 들고 다니면서 모조리 털어가는 통에 도로변 은행이 남아나지 않았는데, 최근에는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고 있어도 주워가는 사람이 드물다. 자칫 잘못하여 밟으면 신을 물로 씻지 않는 이상 쉽게 냄새가 가시지 않기에 조심해서 디뎌야 한다.

지난 가을에는 은행 때문에 적잖은 곤혹을 치렀다. 환자를 진료하는 중에 진료실에서 역한 냄새가 풀풀 났다. 환기를 했지만 가시지 않아 바닥을 닦으니 좀 괜찮아지는 듯 하다가 이내 또 다시 났다. 결국 환자진료를 멈추고는 진료실을 샅샅이 훑어야 했다. 냄새는 나는데 원인을 모르니 난감했다.

혹시나 해서 진료 의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살피는 중에 바퀴 뜸에 끼어있는 노란 물체가 보였다. 은행 껍질이었다. 아마도 환자의 신발에 붙어 있다가 끼어 들어간 것 같았다.

3월 중순인 지금도 병원 앞 보도블록에는 으스러져 껌처럼 붙어있는 은행을 볼 수 있다.흙에 떨어져 나무가 되거나 병을 치료하는 데 쓰여야 할 귀한 존재가 자리를 잘 못 잡는 바람에 천덕꾸러기가 된 것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정말 올바른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인지, 그 자리에 걸맞은 역할을 하고 있는지, 행여 잘 못된 자리에서 고약한 냄새나 피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 기사속 광고는 빅데이터 분석 결과로 본지 편집방침과는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