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익(대구 늘푸른소아청소년과 의원)
몇 해 전, 늦가을쯤의 일이다. 마침 조용한 대기실에서 갑작스럽게 직원들의 새된 고함 소리가 들려와 뛰어 나가보니, 식수대 앞에 영감님 한 분이 쓰러져 계셨다. 허겁지겁 응급소생술을 하면서, 우선 구급차를 부르도록 하고 무슨 영문인지를 물어보았다.
감기 기운이 있어 오셨다며 접수를 한 후, 식수통에서 물을 따르다가 갑자기 쓰러지셨단다. 바로 인근 종합병원 응급실로 모시고 갔다. 자초지종을 들은 담당 의사는 당장 필요한 응급조치는 마쳤으나, 좀 더 큰 대학병원으로 옮기잔다.
그곳에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시도를 해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소생 가능성이 희박하단다. 망연자실, 아직까지 보호자와 연락도 닿지 않아서 우두커니 혼자서 이송 앰뷸런스를 보내고서 돌아왔다.
진료실로 돌아오니 새삼 아득아득해진다. 아무런 의료처치를 한 것이 없으니 의학적으로야 별다른 문제가 있겠냐마는, 워낙에 어수선한 세상이다 보니깐 마음의 각오는 해두셔야 한다는 담당의의 이야기만 귓가에 맴돌 뿐이다.
그동안 이래저래 건네 들은 이야기는 많았지만 막상 당사자가 되어, 그것도 처음 겪는 일이다 보니 그저 막막할 따름이다. 이리저리 선배들에게 전화를 해보았으나, 한결같이 위로 반에 걱정 반의 무거운 목소리들뿐이다.
직원들을 먼저 퇴근 시키고, 텅 빈 진료실에 텅 빈 진료 차트를 앞에 두고서 마냥 멍하니 앉아있었다.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나마 안면이 있는 마을 토박이 한 분에게 전화를 드렸다. 주섬주섬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다짜고짜로 달려오시겠단다.
환자의 인적 상황을 말씀드렸더니, 유별나게 친밀한 사이는 아니지만, 환자의 가족들이 평소 경우가 밝은 사람이니 달리 걱정을 하지 말란다.
멍하니 얼이 빠져 있는 나의 손을 이끌고서 우선 환자분의 댁을 찾아 나선다, 자신의 차를 몰고서 함께 영안실로 찾아 간다, 유가족들에게 그동안 얼마나 혼자서 노심초사를 했는지 전말을 이야기하는 동안 내내, 내처 얼떨떨한 객꾼 노릇이나 할 수밖에는. 가까스로 틈을 타서 그간 경위를 설명하고 조의를 올렸다.
가족 된 도리로 마지막 임종도 하지 못하여 죄스럽고, 도리어 뜻하지 않은 번거로움을 끼쳐서 그저 송구스럽고 고맙다고 한다.
"경우에 어긋난 일 없었으니,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맘 편히 있으라"는 격려를 듣고서 헤어졌다. 연신 머리를 조아리는 나에게, "한 마을에 있으면서, 이만한 일에 또 쓸데없이 마음을 쓴다"는 핀잔과 함께 말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전전긍긍하며 그 후 며칠을 보냈지만 역시나, 쓸데없는 걱정이었을 뿐이었다. 그제야 내가 단지 횡재(橫災)를 피한 그냥 운 좋은 의사가 아니라, 한 마을 이웃으로 믿어주는 이웃이라는 횡재(橫財)를 얻은 억세게 운 좋은 주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 이웃이 있어 좋다. 같은 이웃으로 챙겨주는 든든한 이웃들이 함께 있어서 더더욱 좋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