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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비겁한 사회, 비겁한 사람들

시론 비겁한 사회, 비겁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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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1.01.31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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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훈정(서울 중앙성심의원장)

최근 대구에서 4세 여아가 장중첩증으로 여러 병원들을 헤매다가 사망하여 의료계 안팎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 나도 자식 키우는 부모로서 안타까움과 함께 분노마저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아직 정확한 진상이 다 파악되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당시 병원 노조의 파업으로 정상적인 진료가 어려웠다는 점과 평소에도 응급의료시스템의 허점이 있었다는 두 가지가 가장 큰 원인으로 귀결되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나라 응급의료를 감독하는 보건복지부 응급의료과에서 해당 병원 전공의들의 면허를 정지시키겠다는 발표를 함으로써 의료계의 공분을 사고 있다.

심지어 시민단체들조차 이는 응급의료체계의 근본적 문제를 외면한 졸속적인 조치라고 지탄하고 있다. 우리 응급의료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외면한 채 전공의 한두 사람을 제물로 삼아 넘어가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웬만한 대형병원들 응급의료센터는 전쟁터를 방불할 정도로 난리다. 생명이 경각에 달린 환자들이 구급차를 타고 밀어닥치고 있지만, 침대가 모자라 바닥에 누여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응급병상을 늘리면 되지 않느냐고 우문(愚問)을 하는 분들은 거의 없을 줄로 안다.

응급실이나 중환자실 등은 병상을 늘리면 늘릴수록 적자라는 것은 요즘 웬만한 분들은 알기 때문이다.

응급의료에 대한 의료수가가 원가에 훨씬 못 미치기 때문에 병원들이 응급의료시설이나 인력 확충에 소극적이었고 그 결과 응급환자 구명률(救命率)이 여타 선진국들에 뒤떨어진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정부나 건강보험공단 등은 부족한 재원을 핑계로 애써 외면해왔다.

다른 분야도 아니고 국민의 생사가 달린 응급의료에 있어서조차 '투자한 만큼 성과가 나온다'는 기초적인 경제 상식을 외면한 것이다.

지난 30여 년 간 싸구려 의료에 입맛 들어서인지 국민들은 자신이나 가족의 생사를 좌우할 수 있는 응급의료에조차 선뜻 부담을 지지 않으려는 데도 문제가 있다.

고율의 세금을 부담하고 그 재원으로 국가가 의료를 전적으로 책임지는 영국도 응급실에 가서 검사를 받으려면 며칠 걸리는 실정이니, 낸 만큼 돌려받는 사회보험 형식으로 운영하는 우리 건강보험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몇 달이 멀다하고 터지는 응급의료체계의 부실로 인한 사건들 속에서도 나라를 책임지는 정치인이나 관료는 물론, 하다못해 시민운동가 중에서도 누구 한 사람 의료비 부담을 늘려서라도 이를 바로잡자고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우리나라 싸구려 의료의 문제점을 덮어둔 채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의사들의 직업윤리를 들먹이며 마녀사냥에 바빴을 뿐이다.

젊은 의사 뒤에 숨는 자는 누구인가

이번 사건으로 더욱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 '사냥'이 이제 갓 의사로서 사회에 발을 내딛은 인턴·레지던트 등 젊은 의사들에게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당 대학병원 측은 그들을 보호하기는커녕 권역응급의료센터 지정 취소 등 불이익을 받지 않는 데만 주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관할 지자체 역시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이유로 너무나도 쉽게 면죄부를 주려하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누가 뭐래도 병원 노조의 무책임한 파업에 있다. 2000년 의약분업 파동 당시 의사들의 파업에 대해 '국민의 생명을 볼모로 자신의 이득을 취하려 한다'고 누구보다 목청을 높였던 그들이 아닌가.

수십 년간 고질적으로 이어져온 응급의료시스템의 문제는 차치하고, 최소한 노조의 파업만 없었더라도 어린 생명이 목숨을 잃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역 유일의 권역응급의료센터가 있는 병원 노조가 파업을 하여 환자 진료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고 있는데 해당 지자체는 무엇을 하였으며, 감독 책임이 있는 보건복지부는 무엇을 하였단 말인가.

노조한테는 설설 기던 병원 측은 어찌 어린 의사들이 사지로 내몰리는 데 수수방관, 아니 방조를 하고 있다는 말인가.

평소 전공의들이 봉급 인상, 휴무 보장 등 처우 개선을 요구하면 병원들이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들고 나오는 반박 논리가 '전공의는 근로자이기 전에 피교육자이다'라는 것이었다. 즉 전공의들이 병원에서 교육을 받고 있으므로 근무 여건 상 손해 등을 감수하라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면 아직 배우는 중인 전공의들이 설령 실수를 했다고 쳐도 그 책임은 교육자에게 있는 것이 아닌가.

이웃 일본의 경우 무슨 사고가 생기면 장관 등 담당 공직자가 TV에 나와서 눈물을 흘리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퇴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나온다. 대한민국 응급의료체계에 중대한 과실이 있다면 그 책임은 우선 당해 부서 공무원이,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보건복지부장관이 져야 하는 문제다.

경우에 따라서 관할 지자체나 국립대학을 감독하는 교육과학부 장관도 책임이 없다 할 수 있을까.

좋은 의료서비스를 받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한 의료비를 부담해야 하고, 싼 값으로 고급 인력을 부려먹으려면 그 만큼 철저히 교육시키고 보호해주어야 한다.

이번 사건은 결국 싸구려 건강보험을 설계하고 엉터리 응급의료시스템을 돌린 정부와, 그들의 주장처럼 국민의 생명을 볼모로 이득을 취하려던 노조, 그리고 경영수지에만 신경 쓰느라 교육은 뒷전이고 젊은 의사들을 총알받이로 내세운 병원의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정작 책임을 져야할 사람은 나 몰라라 하고 엉뚱하게 희생양을 찾아 마녀사냥에 나섰으니, 우리나라가 잘못된 것인가 아니면 의사들이 잘못 태어난 것인가?

※ 이 글은 의협신문의 입장이나 편집 방침과 같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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