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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가장 아름다운 얼굴

청진기 가장 아름다운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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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1.01.21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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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만빈(계명의대 교수 동산의료원 신경외과)

▲ 임만빈(계명의대 교수 동산의료원 신경외과)

치매에 걸린 아버지가 노인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시간이 있으면 주중에, 그렇지 않으면 일요일에 한번씩 아버지를 뵈러 그 곳을 방문하곤 했었다. 성탄절이 가까워진 어느 일요일이었다. 병원입구 1층에 입원한 환자들이 만든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제목은 <내 젊은 시절>의 얼굴인데 인형처럼 헝겊으로 얼굴을 만들어 놓고, 눈, 코, 입을 그려 넣고, 머리털과 귀를 만들어 붙여 놓은 작품들이었다. 각 작품의 밑에는 자기가 가장 예뻤던 시절의 얼굴을 만든 것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엄마, 아빠가 가장 예쁘다고 했던 여섯 살 때의 얼굴을 만든 작품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13세에서 18세의 사춘기 얼굴을 만들어 놓고 그것이 자기들의 가장 예쁜 얼굴이라고 했다.

작품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내 머릿속에는 내가 은퇴할 때 저 노인들처럼 신경외과 의사 생활 중 가장 아름다웠던 얼굴을 만들라는 요청을 받으면 어떤 얼굴을 만들 것인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어려운 수술을 끝내고 득의에 찬 모습으로 수술실을 나서는 얼굴일까? 학술대회에서 중요 연제로 뽑힌 논문을 발표하고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으면서 연단을 내려 올 때의 모습일까? 그렇지 않으면 방송이나 신문에서 명의(名醫)라고 면담을 요청해서 인터뷰 한 후 득의에 가득 찬 웃음을 지으면서 면담 장소를 나설 때의 모습일까?

아닌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런 모습들은 나의 신경외과 의사로써의 진정한 아름다운 얼굴 모습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가식적으로 꾸민, 진한 화장을 한, 인공적으로 억지로 만들어 낸 아름다운 얼굴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어떤 얼굴을 신경외과 의사로서의 나의 가장 아름다운 얼굴이라고 만들 것인가? 수술해도 살 수 없을 것 같은 환자를, 보호자를 간곡히 설득해서 최선을 다하면서 밤을 새워 수술하던 얼굴, 시지푸스처럼 죽을 힘을 다하여 바위를 언덕위로 밀어 올렸다가 다시 굴러 떨어지는 광경을 보는, 희망 없는 반복의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력을 다하던 얼굴, 그런 얼굴을 나의 가장 아름다운 신경외과 의사의 얼굴로 그리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머리를 수술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심하게 뇌가 손상되어 피나 손상된 뇌를 제거하도, 뇌압을 낮추는 약을 아무리 주입해도, 감당 못할 만큼 뇌가 두개골 밖으로 솟아오를 때, 처음에는 '신이여 제발 환자의 생명만 구해 주소서'하고 기도 하다가, 나중에는 '신이여 제발 수술 부위를 닫을 수 있을 만큼 만 뇌압을 낮춰 주소서' 하고 기도하던 얼굴, 그러한 지독한 경험을 치르고 나서는 다시는 그런 희망 없는 환자는 수술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였다가도 다시 그런 환자를 만나면, 낚시에 걸렸던 지난 일은 깡그리 잊어 먹고 다시 낚싯밥을 무는 물고기처럼, 다시 달려들어 환자를 살리려고 최선을 다하던 얼굴, 그것이 나의 진정한 신경외과 의사로서의 가장 아름다운 얼굴이라고 인형의 얼굴을 만들고 눈과, 코와 입을 그려 넣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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