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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우리가 잃어버린 것

청진기 우리가 잃어버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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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1.01.14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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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철(경기 안산 유소아청소년과의원)

▲ 유인철(경기 안산 유소아청소년과의원)

어린이집에서 세 살 된 아이를 데리고 왔다. 보호자로 함께 온 교사가 아침에 왔을 때부터 배가 아프다며 징징대고 아무거나 잘 먹던 아이가 간식도 안 먹는 것이 이상하다고 했다.

별다른 증상이 없었고 진찰에서도 배를 누르면 약간 아파할 뿐 특별한 소견이 없었다. 아이가 주기적으로 아팠다 안 아팠다 한다는 말이 약간 걸리긴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나는 소화불량이라서 그러니 음식 조심하고 약을 먹으면 괜찮아질 것이라 하고는 처방전을 끊어 주었다.

사실 배가 아프다고 하는 아이들을 진찰할 때 확신이 서지 않으면 관장을 해서 이상 유무를 확인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런데 그 아이가 왔을 때가 점심시간이 다됐던 터라 관장을 준비하는 일이 번거롭기도 하거니와 식사 전에 냄새를 피우며 관장을 한다는 것이 솔직히 내키지 않았다.

진료를 마치고 병원에 남아 대금 레슨을 받고 있는데 그 아이가 다시 왔다. 퇴근해서 집에 와 보니 아이가 배가 아파 울고 있더라며 엄마가 데리고 왔다. 슬며시 짜증이 났지만 봐줘야 했다. 아이는 엄청 아프다고 표정으로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배를 만지려하자 손으로 막으며 피하려 했다. 심상찮다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고 속으로 '아이고!'하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서둘러 관장을 하니 딸기잼 같은 피가 쏟아졌다. 장중첩증이었다. 큰 병원으로 급히 보내야 했다.

소아청소년과 의사가 금방 명의가 되거나 돌팔이로 전락하는 경우가 장이 꼬이는 장중첩증 환자를 진료할 때다. 초기에는 간단하지만 진단이 늦어지면 개복수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아이가 다른 병원에 갔다면 나는 졸지에 돌팔이가 됐을 것이고, 어쩌면 치료에 일말의 책임을 져야 할 수도 있었다.

그 일은 의사가 기본을 잊으면 환자가 얼마나 위험해지는지를 가르쳐준 아찔하고도 부끄러운 경험이었다.

헌데 그와 비슷한 일이 환자 진료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주민등록상의 고유한 이름과 더불어 자식·부모·제자·친구·시민처럼 공동체 안에서 불리는 사회적인 이름이 함께 따라 다닌다.

그런 이름에는 그에 걸맞은 기본 소양이 필요할진데 어떤 사람에게 'xx로서 기본이 안됐다.'고 한다면 아주 가혹한 말이라 하겠다. 의사로서 기본이 안됐다면 그 사람을 의사라 할 수 없듯이 우리 모두에게도 같은 기준이 적용될 수 있다.

지난해 우리는 개인이나 사회가 기본을 잃어버린 나머지 정말 이래도 되나? 할 정도로 참담한 일을 겪었다.

서울 외곽순환도로 아래에서 몇 십만 원어치 기름을 빼돌리다 유조차에 불이 나 몇 백억 원을 들여 도로를 전면 재시공하게 만든 운전사나 가난한 이웃을 위해 한푼 두푼 모은 정성을 착복한 복지단체 관계자들이 그렇다. 광화문 현판과 국새가 커다란 파장을 몰고 온 사건도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사회에 모범이 돼야 할 종교계와 청문회에서 드러난 공직자들의 행태는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나라 경제력이 세계 10위 내외라지만 선진국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은 돈만으로는 선진국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와 사회문화가 다 같이 발전해야 한다. 새해에는 개인이나 정치·사회 전 분야가 기본을 되찾아 진정한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원년이 되길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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