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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감사의 연하장

청진기 감사의 연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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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0.12.24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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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만빈(계명의대 교수 동산의료원 신경외과)

▲ 임만빈(계명의대 교수 동산의료원 신경외과)

일 년의 마지막 달은 뒤돌아봄으로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달력의 마지막장을 들치고 뒤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올해도 다 가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창밖으로 모든 잎들을 떨어뜨리고 서있는 앙상한 나무들을 바라보며 '올해 무엇을 했고, 무엇을 이루었는가'를 회상하게 된다. 열심히 무엇인가를 한 것 같은데 결국 '나뭇잎 떨어뜨린 저 나무들처럼 아무것도 내 몸에 남긴 것 없이 또 한해를 보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으로 우울해 지기도 한다.

찬 겨울이 끝나기도 전에 몸속에서 새싹을 준비하는 부지런을 떨었고, 찬 바람이 가시기도 전의 이른 봄에 늦을세라 일찍 싹을 틔웠고, 한 여름에는 태양빛을 조금이라도 더 받으려고 까치발을 딛으면서까지 머리를 쳐들고 온 정성을 다하여 풍성하게 키웠던 잎과 열매들, 한참은 단풍이라는 이름으로 아름다움을 뽐내보기도 했었지만, 결국은 모든 잎과 열매들을 버리고 저렇게 해탈한 듯 앙상하게 서있는 나무들, 결국 삶이란 것도 한 동안 제 잘난 맛의 환상 속에서 보내지만 마지막에는 모두 똑같은 앙상한 모습으로 서 있다가 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삶이 그렇게 흘러간다면 사는 동안 조금이라도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할 수만 있다면 남에게 위안을 주는 삶을 살고 싶다. 그렇지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살아가기란 정말로 힘든 것처럼 보인다.

어느 시인은 '식물이외에는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살아가는 존재는 이 세상에 없다'라고 노래도 했지만, 식물도 어떤 때는 독을 품어 우리한테 상처를 주지 않던가. 삶이란 결국 서로 생채기를 내고 그리고 치유하면서 살아가는 하나의 과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상처를 입고 쓰라린 아픔을 겪을 때는 우리는 위안을 얻으려고 한다. 가족으로부터, 친구들로부터 혹은 종교적 믿음으로부터 그것을 찾고 그리고 어느 정도는 얻는다. 그렇지만 병원에 근무하는 나는 부끄럽게도 그것들에서보다 더 많은 위안을 얻는 존재들이 있다.

불행한 사람들, 환자들과 그 가족들로부터다.

생후 3개월에 뇌종양 수술을 받고 20년 가까이 간질을 하면서 어머니를 원망하는 딸을 둔 어머니의 삶을 바라보면서, 뇌에 생긴 혈관기형이 파열되어 왼쪽이 마비되고 하루에도 수없이 간질발작을 하는 환자에게 항경련제의 종류와 용량을 조정하여 간질횟수를 줄이고 휠체어를 장만해주자 '이제는 살 것 같다'고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하는 그녀의 어머니를 보면서, '저런 사람들도 있는데 나는' 하면서 위로를 받으면서 살아온 것이다.

오늘도 외래에서 많은 환자들이 나에게 자신들의 생명을 구해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거꾸로 나는 그들로부터 많은 것들을 얻고 위로를 받으면서 살아온 것을 깨닫는다. 그들을 치료함으로써 돈을 벌어 나와 내 가족이 살아왔고, 속이 상할 때는 그들의 불행을 보면서 위안을 얻었던 것이다.

한해가 가려고 하는 지금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빚을 갚고 싶다. 내가 치료했던 모든 분들께 감사의 연하장을 보내고 싶다. '그 동안 고마웠다'고, 그리고 '내 마음에 많은 위안을 주어서 감사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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