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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연극 '염쟁이 유씨'를 보던 날

청진기 연극 '염쟁이 유씨'를 보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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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0.12.17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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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철(경기 안산 유소아청소년과)

▲ 유인철(경기 안산 유소아청소년과)

진료를 끝낸 토요일 오후, 뒷마무리를 하고 병원 문을 나서려는데 뒤늦게 환자가 한명 왔다. 벌초를 하다 말벌에 팔을 쏘였는데 아파죽겠다고 했다. 문을 연 데가 없어 여기저기 찾아다니다 불이 커져있기에 들어 왔단다. 난감했다.

연극'염쟁이 유씨'를 보러 구로아트밸리 예술극장으로 가야하기 때문이었다. 걸어서 역으로 가 전철을 타고 구로에서 내려 다시 극장까지 걸어가 가볍게 식사를 하고 들어갈 요량이었다.

간호사들은 이미 퇴근한 상태라 진료를 하려면 컴퓨터를 다시 켜는 것부터 시작해 모든 것을 혼자서 해야 하기에 적잖이 망설여졌다. 하지만 이 시간에 진료를 하는 데라고는 큰 병원 응급실밖에 없어 봐주기로 했다. 왼팔 전체가 빨갛고 퉁퉁 부어올라 생각보다 심했다.

그런데 양말을 벗더니 예초기에 발등을 살짝 스쳤다며 같이 봐 달라고 하는 게 아닌가? 단순한 소독으로 끝낼 상처가 아니었다. 3∼4바늘 정도 꿰매야 했다. 괜히 봐준다고 했나 싶었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큰 병원으로 가랄 수는 없었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부리나케 처치를 마치고 다시 뒷마무리를 하고 나니 거의 한 시간이나 지나가고 말았다.

애당초 계획이 죄다 틀어졌다. 택시를 타고 전철역으로 가야했다. 저녁 먹을 시간이 빠듯할 것 같아 승강장 매점에서 만쥬를 한 봉지 샀다. 하지만 혼잡한 전철 안에서는 차마 먹지 못하고 구로역에서 내려 다시 잡아 탄 택시 안에서 급히 먹었다.

시간에 맞춰 가까스로 극장에 도착했다. 하도 서둘렀던 터라 연극에 집중이 잘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운동도 못했지, 환자 치료하고 받은 돈보다 택시비가 더 나갔지, 저녁도 제대로 먹지 못했지…, 생각할수록 새록새록 화가 나서 더 그랬다.

무대는 단순했다. 시상(屍床)위에 관이 놓여있고 병풍치고 몇 벌의 수의를 천장에 걸어 놨을 뿐인데도 영안실을 보고 있는 듯 생생했다. 염쟁이 유순웅은 염하는 과정을 차근차근 보여주며 그 의미를 설명한다.

그와 함께 자신이 겪었던 갖가지 사연을 풀어 놓으며 다양한 인물들을 등장시키는데, 그런 인물들을 본인이 직접 연기를 하기도 하고 즉석에서 관객을 무대 위로 불러 배역을 주고 같이 하기도 했다.

이처럼 관객들과 함께 풍성한 무대를 만들어 감으로써 '민족광대상'을 받은 배우답게 자칫 지루하기 쉬운 모노드라마를 노련하게 이끌어 갔다.

영안실하면 왠지 숙연해지지 않던가? 죽음하면 괜히 무거워지지 않던가? 염을 하다 관객들과 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연기를 하다 관객들과 술도 마시면서 죽은 사람이야기와 산 사람이야기가 자연스레 버무려졌다. 영안실을 배경으로 죽음을 소재로 한 연극이지만 끝까지 재미있는 이유다.

그렇다고 재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연극이 진행되면서 화가 났던 것이 수그러들고, 중반에 이르자 치료를 해주면서 알게 모르게 짜증을 내서 환자도 꽤나 불편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끝나갈 쯤에는 환자한테 그러면 안 되는데 하며 후회를 하고 있었다.

'염쟁이 유씨'는 전통 장례문화를 가르쳐주는 연극이 아니다. 죽음을 통해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일깨우고, 자신을 뒤돌아보게 만들고,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으로 잘 사는 것인지를 생각케 하는 산 사람을 위한 이야기다.

염쟁이는 말한다. 살림살이가 어떤지는 설거지를 보면 알고 사람 됨됨이는 남겨진 뒷모습을 보면 안다고. 죽은 사람 썩는 냄새보다 더 구역질나는 게 산사람 썩은 냄새라고. 내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나의 뒷모습은? 내가 지나간 자리에 남아있는 냄새는 과연 어떨까? 그는 또 말한다.

죽은 이를 위해 흘리는 눈물보다 산 사람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 더 소중한 법이라고. 나는 다른 사람을 위해, 아파서 찾아온 환자들을 위해 과연 얼마만큼 눈물을 흘렸던가?

연극이 끝나 밖으로 나오니 우산을 쓰기도 그렇고 안 쓰기도 그런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냥 걷기로 했다. 철학자가 되고 싶은 밤이었다.

"죽어서 땅에만 묻히고 사람의 마음속에 묻히지 못하면 헛산 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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