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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다시 깊어가는 가을밤에

청진기 다시 깊어가는 가을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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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0.12.10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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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익(대구 늘푸른소아청소년과의원)

▲ 송광익(대구 늘푸른소아청소년과의원)

'힘든 학우 돕기 자선바자회'의 날이다. 그나마 이어지던 학교급식마저 끊겨서, 더 길기만할 동네 아이들의 겨울방학나기를 미리 준비하자는 행사다.

토요일 오후 진료 때문에 사전에 예고된 지각이었지만, 끼어들 자리까지 예약된 건 아니다. 재작년에는 고작 술과 음료수 담은 통이나 지키는 구석자리를 맡았다가, 작년엔 제법 운이 닿아서 떡볶이 코너를 정식으로 분양받아 꽤나 따뜻한 가을저녁을 보낼 수 있었다.

소문난 동네잔치답게 먹을거리와 볼거리는 풍성하였지만, 정작 일거리 경쟁은 예나 지금이나 치열하다. 풍물놀이로 막을 열었다는 놀이판은 아이들의 태권도 시범과 현악합주에다 막간마다 색소폰 연주와 노래자랑까지 뒤죽박죽으로 뒤섞였지만 신통방통한 하모니를 이루며 한껏 동네잔치 분위기를 자아낸다.

마음만큼이나 손발도 절로 척척 맞는 아줌마부대의 화끈하고도 꼼꼼한 사전준비로 각종 코너마다 넘치는 음식들이 오가는 이들의 군침을 돌게 한다.

이미 손발을 척척 다 맞추었다는 것은 행사를 이끌어가는 회장님에게야 흐뭇한 광경이겠지만 일손이 서툰데다가, 더욱이 늦장까지 부린 나 같은 놈에게는 아득하고도 구슬픈 장벽이 아닐 수 없다.

"아이고,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고맙습니다만…" 이라는 너무도 귀에 익숙한, 너무나도 살가워서 도리어 눈물겨운 문전박대로 이곳저곳 어슬렁거리며 눈치만 보고 있을 밖에는.

주방 보조는 애당초 언감생심이고, 음식 나르기 판은 거치적거리다가 어마뜨거라 비켜주고, 구석구석 각종 코너들은 넘볼 수 없는 화기애애함으로 그냥 곁눈질로 부럽게 바라만 본다. 행운도 미리 준비한 이들을 더 편애한다는 현실을 새삼 곱씹어 보면서 말이다.

천신만고로 설거지 판에 한 자리가 비어 있기에, 모르는 척 뭉그적거리며 엉덩이를 걸친다. 연배가 지긋하신 교감선생님이 과부 설움이야 홀아비가 안다는 듯, 은근한 웃음으로 자리를 내어주신다.

이미 파전 부치는 곳에서 시작하여 음식 나르기 판까지 전전하다 이제야 겨우 정착하였노라고 하시면서, "비정규직으로 떠돌아다니노라 마음고생이 많으셨지요?" 라며 건네는 인사에 가슴 한편이 뭉클해진다.

까짓 우아하고도 거룩한 군자삼락(君子三樂)에야 비할 수 없겠지만, 설거지 판 남정네들의 즐거움 또한 어찌 소소하다 할 것인가? '그릇을 닦고 때로 수다를 나누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닦을 그릇이 있어 멀리서도 챙겨주니 또한 즐겁지 아니하겠는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아니하여도 자리 빼앗길 걱정을 아니하면, 또한 명당이 아니겠는가.'

보람찬 하루를 끝내놓고서 파장하는 길. 월동채소 값이 오른 만큼 동네아이들 김장 마련에 깊어가던 회원들의 근심도 예년에 비해 부쩍 오른 매상과 고마운 성금으로 덜어졌다.

저녁 한때 오신다던 가을비도 판을 접고 나서야 눈치껏, 고맙게 내리기 시작한다. 서로의 손과 발을 맞추고 마음을 모아서 뭔가를, 함께 이루어냈다는 성취감과 유대감으로 절로 어깨 으쓱하고 한껏 배부른 가을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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