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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군의관과 애기단풍

청진기 군의관과 애기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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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0.11.26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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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철(안산 유소아과의원장)

▲ 유인철(안산 유소아과의원장)

연대본부는 나지막한 산중턱에 있었다. 제일 안쪽 부대 안에서 가장 높은 곳에는 본부건물이 당당하게 서있고 한 단 아래가 연병장이다. 연병장을 지나 더 낮은 부대 바깥은 들판이 널찍하게 펼쳐진다. 본부에서 내려다보면 앞이 탁 트여 눈이 시원했다.

그러긴 해도 내 눈길이 자주 갔던 데는 본부건물 앞에 있는 애기단풍나무다. 천수관음상의 팔처럼 많은 가지가 뻗어있어 자태가 풍성한데다가 가을이면 얼마나 단풍이 붉게 드는지 불타는 것 같다는 표현에 딱 들어맞았다.

훈련이나 작업이 없는 날이면 간부들은 점심시간에 족구를 했다. 다들 달인의 경지인지라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었다. 같이 하고는 싶었으나 내가 속하면 늘 지기에 눈치가 보여 자주 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쓸모없는 군의관이란 말은 아니다.

매주 수요일 오후는 전투체육의 날이라고 해서 운동을 했는데 축구를 하는 날이면 나는 언제나 연대장의 상대편에 되었다. 공을 몰고 오는 연대장을 과감하게 막아서거나 거리낌 없이 가로채기를 할 수 있는 간부는 군의관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햇볕이 좋은 가을날 여느 때처럼 단풍나무아래에 있는 벤치에 앉아 족구 구경을 하고 있었다. 나이가 지긋한 주임상사가 내 옆에 와 앉았다.

"군의관님은 안하세요?"
"실력이 너무 딸려 힘들어요. 단풍이 참 아름답네요."

"보는 사람들마다 감탄을 하지요. 전임 사단장님은 사단본부로 캐가고 싶어 하셨어요. 그렇지만 저는 단풍보다 저기 보이는 누런 들판이 더 좋더라고요. 군의관님은 안 그러세요?"하며 앞을 가리켰다. 나는 정색을 하며 "그러세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했고 대화는 거기에서 끝났다.

이듬해 주임상사는 전출을 가고 나는 제대를 해 민간인으로 돌아왔다. 가을이면 빨간 단풍을, 샛노란 은행나무를, 하얀 억새를 찾아다녔다. 아니 가을뿐만이 아니라 일 년 내내 화려하고 감각적인 것들을 추구하며 살아왔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귀로 듣고 깊은 가슴으로 느끼는 오디오가 아니라 눈으로 보고 머리로 가볍게 느끼는 비디오시대에 걸맞은 일반적인 삶의 방식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감각적인 것에는 순응현상이 있어 가면 갈수록 더욱 더 강한 자극을 원하게 마련이고 그 끝은 언제나 공허하다. 공허함을 채우려고 새로운 자극을 또 찾고.

시인 장석남은〈물맛〉이라는 시에서 "물맛을 차차 알아간다"라고 했다. 톡톡 쏘는 음료수만 찾던 내가 물에도 맛이 있고 바람에도 냄새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됐다. 번쩍거리는 가구보다 은근한 앤티크가구가 더 맘에 든다.

부모님은 밤마다 허리와 무릎이 아파 파스와 찜질기가 없으면 안 되면서도 낮이 되면 기어이 들에 나가신다. 한때는 "그 까짓게 몇 푼어치나 된다고 그러시느냐? 오히려 병원비가 더 들겠다"며 못마땅하게 여겼었다.

논을 보면 "수입농산물이 넘쳐나고 쌀이 남아도는데 무슨 돈이 될까?"싶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부모님이 농사를 그만두지 못하는 것은 삶이기 때문이고, 벼가 익어가는 들판은 돈이 아니라 보람이었다.

해남·강진으로 답사여행을 갈 때였다. 버스가 김제를 지나가는데 인솔자가 창밖을 보라며 누렇게 익어 가는 벼와 샛노란 은행나무 중에 어느 것이 더 맘에 드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 질문이 무슨 뜻일까 생각하다가 옛날 주임상사가 떠올랐다. 그랬다. 주임상사는 매일하는 군대 얘기가 아니라 다른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내가 이해하지 못해 대화가 끊어진 거였다.

일요일 밤 뉴스마다 휴일표정으로 가을을 보여준다. 올해도 연대본부 앞 애기단풍은 여전할 것이다. 까마득한 후배 군의관은 아름답다고 감탄하고, 나이 지긋한 주임상사는 단풍나무보다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들판이 더 좋다고 하고 있겠지…. 시간은 그렇게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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