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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응급의학과의 공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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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0.10.08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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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단국의대 교수 기생충학)
▲ 서민(단국의대 교수 기생충학)

1993년, 조교로 근무하던 내게 어머니가 전화를 하셨다. 친구분이 갑자기 편찮으셔서 응급실을 가는데 잘 봐달라는 얘기를 해달라는 거다. 그때가 밤 9시 경, 하던 일을 멈추고 응급실 앞에서 어머니 친구를 기다렸다. 한눈에 보기에도 친구분은 아파 보였다. 원래 신장에 결석이 있었다는데 그게 도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병원 응급실은 이미 환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TV에서처럼 의사들이 달려와 환자를 옮기는 건 기대하지 않았지만, 누울만한 침대조차 구할 수 없는 현실은 좀 서글펐다. 결국 친구분은 응급실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누운 채 "아이고 아이고"를 연발했다.

삼십분이 지나도록 의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친구분 아들이 '뭔가 좀 해보라'는 눈길로 날 쳐다봤기에 난 혹시라도 아는 친구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당직실 문을 두드렸다.

응급실 안의 광경은 실망스러웠다. 아는 친구가 없어서라기보다 인턴 네 명이 테이블에 앉아 카드게임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당시만 해도 인턴 대여섯 명이 응급실을 책임지는 시스템이었는데, 그 중 네 명이 카드를 치고 있었으니 응급실에서 의사를 보기가 힘들 수밖에. 후배임이 분명한 그들에게 난 학교를 팔았다. "저, 이 학교 졸업생인데요, 환자 한명만 봐주시면 안될까요?" 한명이 날 보면서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이 판만 치고 갈게요." 어머니 친구분에게 의사가 온 건 그로부터 십오 분이 더 지나서였다.

그네들을 비난하고픈 마음은 없다. 인턴들의 근무평정을 매기는 전공의가 없는 응급실에서 밀려드는 환자들을 상대하다보면 피로를 이길 재미있는 게 생각날 법도 할 테니까. 각 과를 한 달 남짓한 시간 동안 로테이션하는 인턴들이 응급실 근무에 대단한 사명감을 갖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문제는 응급실을 인턴들에게만 맡겨놓은 시스템이었고, 그 후 아는 사람을 도와주러 응급실에 갈 때마다 난 비슷한 경험을 되풀이해야 했다. 저런 곳에서 환자가 나을 수 있을까? 이게 내가 당시 했던 생각이었다.

응급의학과가 생기면서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 언젠가 어머니를 모시고 그 병원 응급실을 갔을 때,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의사의 진료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웠다. 응급실을 지키는 전공의들은 인턴보다 훨씬 노련해 보였고, 하나같이 친절했다.

굳이 "저 졸업생인데요"라며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그게 다 로테이션을 하는 대신 '응급실은 내가 지킨다'는 사명감에 가득 찬 의사들이 응급실에 있는 덕분이리라. 지금 내가 몸담은 병원도 그건 마찬가지여서, 환자가 들어오는 동시에 의사가 달려와 진찰을 해줬다.

'이 정도면 응급실 올만 한데'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현대 의학이 자리 잡고 난 뒤에도 새로운 과가 여럿 생겼다. 의학이 발전하면서 세분화·전문화되는 건 바람직한 일일 테지만, 당장 몸이 아파 고생하는 환자들에게 가장 커다란 복음은 바로 응급의학과의 탄생이 아닐까 싶다.

손이 떨리는 환자가 신경과를 가든 신경외과를 가든 크게 삶이 달라지지 않을 테지만, 응급의학과 덕분에 몸을 눕힐 침대조차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일은 이제 없어졌으니 말이다.

역시나 중요한 건 시스템을 갖추는 것, 환자의 행복을 위해 의학이 뭘 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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