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진기 과장 단상
청진기 과장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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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0.09.10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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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단국의대 교수 기생충학교실)
▲ 서민(단국의대 교수 기생충학교실)

"네가 너희 과 과장이야?"
친구가 묻기에 그렇다고 답했더니 엄청 놀란다. 그래서 덧붙였다.
"우리 과엔 나 혼자 있어."

친구의 눈에 어리던 존경의 빛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뭐야? 거느리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 과장 하면 뭐해?"

그러니까 그 친구는 과장이 그 과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고, 다른 과원들은 부하처럼 포진해 있다고 생각한 거다.

그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일반 회사의 과장을 생각해서겠지만, 의사를 다루는 의학드라마도 그의 관념에 일조하지 않았을까 싶다. 일례로 3년 전 폭발적인 인기 속에 방영된 '하얀거탑'은 장동혁과 노민국이 외과 과장을 놓고 겨루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의학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에서도 비슷한 얘기가 나온다. 실력이 좋은 의사 하나가 외과 과장은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현 과장은 뉴욕에서 잘나가는 의사를 스카우트한다. 실력 좋은 의사는 과장에게 따지고, 과장은 이런 대답을 들려준다.

"넌 너밖에 몰라." 이게 다 미국과 일본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었지만, 그 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나라 의사들도 정치인 못지않게 과장직에 집착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종합병원에서 과장직에 연연하는 사람을 만나긴 쉽지 않다. 과장이 된다고 해서 무슨 커다란 권력을 휘두르는 것도 아니니 그럴 수밖에. 대부분의 대학병원에서 과장은 일정 기간 과에 봉사하는 자리고, 몇 년의 터울로 포진하고 있는 교수들이 돌아가며 과장직을 수행한다.

한마디로 때가 되면 누구나 하는 게 과장이란 얘기다. 올해 초까지 과장을 지낸 모 선생은 과장직을 이렇게 정의한다. "병원 과장은 휴가 신청서를 냈을 때 싸인을 해주는 사람이죠. 가끔 회의에도 들어가고…."

이런 시스템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과장이 별로 힘이 없는 건 많은 종합병원이 같은 대학 출신의 선후배간으로 이루어진 탓도 있다. 신임교수를 뽑는 건 자기 울타리에서 자란 나이 어린 막내를 충원하는 과정이지, 실력과 경험을 두루 갖춘 의사를 외부에서 데려오는 건 아니다.

어떤 의사가 과장이라고 으스대봤자 그가 학생 때 교수였던 선배 의사에게 그는 여전히 학생 티를 벗지 못한 병아리 의사에 불과하다. 그러니 과장이 되었다고 과의 낡은 분위기를 혁신한다든지 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촘촘한 선후배의 그물망 속에선 그저 문제 일으키지 않고 잘 지내는 게 최선이니 말이다.

물론 '그레이 아나토미' 시스템에도 단점은 있다. 과장의 권한이 무지하게 크고, 그래서 과 구성원이 전부 과장을 하겠다는 야망을 품는다면 안그래도 힘든 의사 일이 얼마나 피곤하겠는가? 현 과장에게 잘보이는 것도 피곤하고, 경쟁자를 끌어내리려 술수를 쓰는 것도 점잖기로 유명한 의사들이 할 일은 아닌 것처럼 생각된다.

현 과장한테 찾아가 "저 친구는 경마를 한다"며 음해를 하는 의사의 모습, 상상만으로도 머리가 아프다. 이런저런 문제들을 절충한 제도가 정착되면 좋겠다 싶다. 과장 생각을 하다보니 내가 몸담은 기생충학과에 나 혼자 있는 게 좋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과장으로서 전권을 휘두르고, 내 자리를 위협할 경쟁자도 없으니까. 이건 물론 농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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