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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24-04-24 19:44 (수)
구름 뒤엔 태양이 있다

구름 뒤엔 태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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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0.08.20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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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숙자(충북 청주·김숙자소아청소년과병원장)

소아(청소년)과 전문의가 되고 나서 얼마 안 돼 개원한 내가 밀려드는 환자를 뒤로 하고 미국 유학을 떠난 까닭은 유전병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내원한 환자 가운데 한 집의 남자 형제들이 연달아 사망한 사례가 있었는데, 네번째로 태어난 여자아이는 무사히 자라나는 것을 보고 유전병에 대해 더 공부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기초과정을 다시 밟아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미국에 가면 뭔가 대단한 걸 배울 것이란 막연한 기대와 달리 뉴욕에서의 수련의 생활은 바쁘기만 했을 뿐 만족스럽지 못했다. 미국 소아과 전문의가 됐지만 유전병에 대한 나의 지적 갈증은 좀처럼 채워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신생아 스크리닝 검사를 제일 처음 실시한 닥터 구쓰리의 추천으로 하버드에 갈 기회를 얻었다. 하버드에는 치료가 안 되는 전세계의 아이들이 다 모인 곳 같았다.

이후 보스턴에서 유전병 환자를 보며 MIT공대에 찾아갔다. 소문으로만 듣던 질량분석기를 보여달라고 부탁했으나 문밖에서 거절당했다. 난 멈추지 않았다. 다시 생화학연구소로 가서 일주일간 질량을 측정하는 가스질량분석의 기초에 대해 유료 수련을 받았다.

피 한 방울로 여러가지 질병을 동시에 진단한다는 얘기를 듣고 주임교수를 졸라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는 듀크대학에 파견을 나갔다. 그 비싸다는 질량분석기를 보고 어떻게 그런 검사를 할 수 있는지 이미 병명이 진단된 환자의 건조혈액 여과지를 가지고 분석을 했다.

100% 진단이 나오는 이 기기의 매력에 나는 흠뻑 빠졌다. 당시 미국에서 질량분석을 하는 곳이라면 한 군데도 빠지지 않고 돌아다녔다. 처음하는 공부라 가는 데마다 복사를 많이 했던 기억이 난다.

미국 유전학 전문의가 돼 다시 한국땅을 밟은 나는 가슴이 설레었다. 힘들 게 배운 선진 의학지식을 환자 진료에 적용해보고 싶었다. 보건복지부와 충북대·대덕연구단지 등을 찾아갔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내가 할 수 있는 적절한 일을 찾을 수 없었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다. 다시 김숙자소아과를 열고 환자를 보면서 텐덤 질량분석기를 국내에 들여오기로 했다. 당시 IMF 외환위기로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은행에 다니는 동생 남편의 도움을 받아 순조롭게 일이 진행됐다. 그러나 기기가 한국에 도착하기 직전 나는 뇌출혈로 쓰러졌다.

오른쪽이 마비가 된 나 자신이 너무나 처량했다. 한순간 모든 희망은 물거품이 됐다. '인생이 이렇게도 쉽게 끝나는구나' 하고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다행히 뇌수술을 받고 몸이 회복돼 다시 병원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메사추세츠병원과 메이오클리닉에서 수련을 받고 돌아왔다. 그리고 마침내 뇌수술로 잠시 보류했던 질량분석기기를 들여왔다. 2000년 국내 최초로 질량분석기를 이용해 신생아 스크리닝 검사를 시작한 것이다.

검사를 하다 문제가 생겨도 국내에는 텐덤 질량분석기를 다루는 전문가가 없었기 때문에 한밤 중 영국으로 전화해 해결했다. 한번은 환자 중에 질량분석 결과에 이상소견이 있어 직접 환아와 부모를 데리고 하버드대병원 주임교수에게 가서 확진을 받은 적도 있다.

이런 분석기계로 신생아 대사검사를 한다는 소문이 나자 전국에서 상업적으로 운영하는 검사센터들이 몰려왔다. 나는 그때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시간과 장소를 따지지 않고 가서 질량분석이 무엇이고 어떻게 진단을 하고 또 실제 환자 진료를 어떻게 하는지 강의하며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조기에 발견해 조기에 치료하겠다는 나의 의지는 무참히 무너졌다. 영업망이 없는 개인 의사로서 상업적으로 운영하는 검사센터들과 경쟁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던 것이다. 검사하는 방법을 배우고 기계들을 사서 모두 떠나버렸다.

정부에서는 6종의 선천성 대사질환검사에 대해서만 치료와 추적관찰을 한다. 국내에서 태어난 신생아의 70% 이상은 이 6종 이외에도 텐덤질량분석기를 이용한 광범위한 검사를 받는다.

아기에게 유용한 검사를 해서 뇌 손상을 막고 조기에 치료하려는 부모들의 소망으로 정부는 광범위한 검사를 실시하고 있지만 정작 선천성대사질환에 대한 관리는 전혀 없는 실정인 것이다.

좋은 기계로 정확한 검사를 하지만 그런 진단이 조기치료에 연결이 되지 않거나 잘못 치료되어 평생 짊어지고 가야 될 장애를 입는 경우가 많다.

텐덤을 이용하는 검사는 피만 뽑아주면 돈이 되는 수입원으로 전락했다. 여기저기 상업적인 검사센터가 경쟁적으로 생겨났다. 미국에서 취득한 유전학 전문의나 소아과 전문의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조기에 진단과 치료를 받지 못해 장애를 입거나 치료시기를 놓친 아기들만이 어디서 소문을 듣거나 인터넷을 통해 알고 하나씩 하나씩 나에게 찾아왔다.

신생아 대사검사를 해도 치료가 뒤따르지 않아 뇌손상을 입는 현실이 답답했다. 청와대 신문고를 두들겨 이명박 대통령에게 호소했으나 보건복지부에서 돌아온 답변은 "다음에 기회가 되면 연락 드리겠습니다"는 공허한 메아리뿐이었다.

미국에서 공부할 당시 이런 검사가 25달러 정도의 비용이 들고 검사 결과 이상이 있을 경우 주 정부산하에 있는 검사센터에서 재검하고, 확진하고 전문가의 진료로 연결되는 것을 봤다.

일찍 발견돼 건강하게 자라나는 아이들을 보고 '내가 무식해서' 저 세상으로 보낸 꼬마들을 기억하며, <의사를 위한 선천성대사질환의 진단과 치료지침>이라는 책을 썼다.

한국에서 발견된 대사질환 환자 중에 정기적인 투석으로 대사물질을 제거하던 환자들은 식이조절로 뱃속에 장치돼 있는 복막투석기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투석을 하지 않아도 식이요법으로 얼마든지 대사질환 관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병이 발견되자마자 부모에게 교육을 하고 어떻게 영양섭취를 하는지 훈련을 시키면, 유전질환이라고 놀란 부모에게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되는 것은 피할 수 없지만 안정을 되찾은 어린 생명을 보고 잘 키워야겠다는 희망을 준다.

우리나라도 선천성 대사질환 검사가 돈을 벌기 위해서 하는 검사가 아니고 진정 한국을 책임질 젊은 세대에게 건강을 유지하고, 뇌 손상을 입지 않고 잘 자라도록 기초가 되는 그런 체계가 필요하다. 어디로 가야될지, 무엇을 해야될지 막막하기만 한 부모들에게 대사질환이 발견되자마자 도와줄 정부가 필요하다.

한국은 경제적으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 그러나 출생률이 떨어지고 있는 한국의 2세들을 위해 절실한 관심이 필요하다. 미국에서 태어나면 정상아가 되고, 한국에서 태어나면 장애아가 되는 이런 차이가 없어지는 날을 기대해 본다.

국민을 위해 발벗고 뛰겠다는 많은 정치인들의 조그마한 관심이 절실하다. 많은 국민을 대상으로 시행하고 있는 텐덤을 이용한 선천성대사질환이 제 의미와 역할을 찾아 장애로 인한 재앙을 막아야 한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한국의 어린이들을 돕겠다는 나의 소박한 꿈은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러나 잘못 치료된 유전자질환 환자를 볼 때마다 답답하고 안타까워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나는 미국병리학회 CAP 인증을 받아 미국에 가지 않고도 환자가 발생하자마자 진료 당일 병을 확진받을 수 있는 작은 검사실을 만들었다. 언젠가는 이런 꿈이 이뤄질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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