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진기 의사는 벌거벗은 임금님인가?
청진기 의사는 벌거벗은 임금님인가?
  • Doctorsnews admin@doctorsnews.co.kr
  • 승인 2010.06.11 09: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보문(가톨릭 의학전문대학원 교수 정신과/인문사회의학과)
▲ 최보문(가톨릭 의학전문대학원 교수 정신과/인문사회의학과)

의사의 사회적 위상을 높이기 위해 전문직 윤리를 강화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다. 그런데 과거를 돌아보면, 전문직 윤리에 관한 논의는 의사의 위상이 추락하면서 무성해지기 시작한 것이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의사가 헌신과 치유의 상징으로서 존경의 대상이었던 시기는 역사적으로 볼 때 겨우 반세기 정도에 불과하다. 19세기까지도 약초의나 동종요법가 등과 힘겹게 경쟁해야 했고 면허권을 얻기 위해 국가와 협상해야만 했었다.

배타적 면허권이 실질적으로 부여된 시기는 서구의 경우 겨우 19세기 중반이후이다. 그리고 20세기 양대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비로소 의사는 전문직으로서의 사회적 위상을 공고히 하게 된다.

아비규환의 전쟁터에서 의학이 가진 치유의 힘을 목격하고, 게다가 살육과 증오의 현장을 통해 인간성의 어두운 심연을 들여다보게 된 전후 사회에서 의사는 적과 아군의 입장을 초월하여 자신을 던져 치료에 헌신하는 직종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 서양의학 면허제도가 확립된 시기가 이즈음이며, 그래서 격랑의 근대성을 체험해내지 못한 한국의 의사는 다 자란 성인으로 출생하였던지라 혼돈의 20세기를 헤쳐 나갈 역량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의학의 황금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역사학자 번암(John Burnham)이 말한 것처럼 20세기 들어 첫 60년간 지속되었을 뿐이다. 의료비용 상승과 더불어 국가와 자본의 통제가 점진적으로 강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1980~1990년대를 "전문직 몰락의 시기"라고 본다면 마지막으로 무너진 전문직종은 의사로서, 1996년 크라우스(Elliot Krause)는 이를 "거인의 몰락(Falling of a Giant)"이라고 묘사했다.

2002년 발표된 의사헌장은 이런 위기의식을 배경으로 한 것이며, 거의 동시에 다양한 전문분야가 전문직을 새롭게 정의내리고 윤리선언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의사의 자율성은 날이 갈수록 축소되고 책임은 무거워졌다는 점에서 이들 윤리선언은 시도에 불과한 것으로 평가된다.

의사들의 자기인식도 변화되어 이들 선언에 대한 날선 비판은 의사들 자신으로부터 나오고 있다. 예를 들자면,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고서라도 환자의 이익을 우선해야 한다는 이타적 윤리의 실천에는 사회적 특권과 배타적 권리라는 배경이 암묵적 계약에 의해 병행해 왔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권리보장은 결여된 채 아무런 대가없이 자신의 삶을 희생하고 의업에 헌신하라는 윤리의식은 신세대 젊은 의사들에게는 비현실적으로만 들리는 것이다.

이 사회가 과연 의사의 도덕성을 지원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에서부터, 정의(justice)를 말하는 의사헌장은 사회적 가치관과 동떨어져 있다는 분석과, 더 나아가 의사헌장은 비현실적인 장식적 어구를 나열한 것에 불과하며 그 선언에 감동하는 사람은 의사 자신들뿐이라는 자괴감 섞인 비판에까지 이르고 있다.

그렇다면 의사헌장은 '임금님의 옷'인가? 이 사회 누구도 우리가 걸쳤다고 믿는 윤리라는 금실 옷을 믿지 않는 것 같기에 말이다.

어쩌면 현대의 의사에게 필요한 옷은 '순수한 사람에게만 보인다는 고귀한 옷'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 이 자리에 꼭 맞는 활동하기 편한 일상복이 아닐지, 그래서 의사헌장은 헌신과 희생으로 가득 찬 감동의 어구가 아니라 성실하게 일하고 정직한 대가를 기대하게 하는 현실적 구체성으로 다가와야 하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기사속 광고는 빅데이터 분석 결과로 본지 편집방침과는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