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티 상처 꿰메기(Haiti, Wound Repair)
"아이티 상처 꿰메기(Haiti, Wound Repa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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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0.05.03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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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티 지진난민 구호 의료단 활동 보고 -

김용민(충북의대 교수·정형외과)
대한적십자사와 대한의사협회가 공동주관한 아이티 지진 이재민 구호 의료단 제 2진의 일원으로 선발되어 2월 10일부터 18일까지 8박 9일동안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에서 이재민 진료를 하였다. 

 아이티는 세계 최초로 흑인노예들이 세운 독립국가로, 독립국의 역사는 200년을 넘긴다.

그러나 이후로 이 나라는 정치적 불안 속에 서방세계 최빈국의 오명을 벗지 못하였다. 20세기 후반, 이어지는 정쟁으로 마침내 유엔에서 파견한 평화유지군이 주둔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불안정하다보니 민생이 피폐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가난한 나라에 태어난 것이 죄인가, 하루하루 어렵게 살아가던 그들에게 자연의 대재앙이 내린 것은 2010년 1월 12일..오후 4시 53분 9초. 수도인 포르토프랭스의 남쪽 수십km에서 발생한 진도 7.0의 대지진으로 순식간에 20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훨씬 많은 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집을 잃은 이재민 수백만 명이 갑자기 거리에 나앉게 되었다.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동시 다발적으로 발생한 많은 외상환자들에게 의료의 손길은 멀기만 할 뿐.. 부러진 뼈조각, 터진 살이 그저 방치되고만 있었다.

건물 더미에 신체의 일부가 깔려 있어서 구출할 수 없었던 사람들, 다시는 원형으로 복구될 수 없을 정도로 사지가 짓이겨진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건지는 대신 팔, 다리를 잃어야 했다. 이조차도지진 직후 어디론가 자취를 감춘 현지 의료인들을 대신하여 급히 파견된 미국 의사들이 해야 했던 일이다.

나는 아이티 지진 발생 후 2주가량 지나서 우연히 대한의사협회 홈페이지를 열어보게 되었다. 그곳에는 아이티 지진 구호에 동참할 의협회원을 모집하고 있어서 개인봉사자로 지원하였다. 그리곤 잊었다. 딸아이의 대학진학 문제로 골치 아픈 데다가 새 학기를 맞아 학생행사 등 각종 업무로 매우 바빴기 때문이다.

그런데 2월 5일 금요일 딸의 고등학교 졸업식을 이 마친 오후, 낯선 전화번호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여기 의협 사무실입니다. 김용민 선생님 맞으신지요?” “그런데요..” “아이티 지진 피해 구호 2진으로 참여해주실 수 있나 전화드렸습니다” 2진이라면 2월 9일에 출발하는 것으로 하여 이미 참가자명단까지 확정 발표가 났던 터... 3일 반을 남겨놓고 갈 수 있냐고, 아니 꼭 가달라고 전화를 하다니... 처음에는 곤란하겠다고 답을 하였다.

그런데 너무도 간절히 내가 가주기를 바라는 목소리였다. 정형외과가 꼭 필요하므로... 일단 학장님의 승낙을 얻은 뒤 남은 것은 가족.. 아이티는 그 당시 여진의 공포와, 치안의 부재에 대한 이야기가 매스컴을 오르내리고 있는 위험지역이었으므로 많은 식구의 가장인 나로서는 쉽게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아내는 아이티 구호 의료단 참가 제의가 왔다는 내말을 듣자말자 놀랍게도 “잘됐다.

갔다 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런 위험한 곳에 가도 괜챦을까?’의 우려 한마디도 없이... 신앙심이 깊은 아내는 아이티 재난 이후 그들에게 아무런 힘이 되어주지 못하고 있음에 마음이 아팠다고 한다. 그런데 남편이 의료단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 자신에게도 큰 위안이 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직장과 집에서 모두 승인을 받았으니 당연히 가야 하는 것일 텐데, 정작 나 자신은 선뜻 결정이 쉽지 않았다. 점점 나이는 먹어가는데, 어딘지도 모르는 머나먼 아이티란 곳으로의 여행이 얼마나 힘들텐데... 다들 위험하다고 하는데 가도 되나 싶기도 하고 준비기간이 너무 짧은 것도 걱정이었다.

그렇지만, 주변 분위기가 가는 쪽으로 돌아선 마당에 내가 안 간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저쪽에서는 나를 원하고 있다!! 

 

외래 환자들을 불러 미리 진료하는 등 2주치 일을 2월 8일 월요일 하루 동안에 모두 처리해놓아야 했으니 가히 정신없었던 하루였다. 게다가 파상풍 등 예방접종, 말라리아 약 준비 등 아이티에 가기 위한 준비도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현지에 가 있는 1진으로부터 골절수술할 환자들이 많다며 수술준비를 해왔으면 좋겠다는 연락이 옴에 따라, 핸드 드릴과 골절 고정용 핀을 준비하였고, 수술용 확대경(Loupes)을 포함한 몇몇 필수 장비를 챙겼다. 붕대가위도 하나...

월요일 밤엔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동안 외국 여행을 다녀보긴 했지만 이번 여행은 가장 멀고, 가장 낯선 곳이다. 게다가 지진과 위생, 치안 등 어느 하나 안전이 보장된 게 없지 않은가? 그동안은 여행 떠나기 전날 한 번도 그런 생각이 안 들었었는데, 어쩌면 이번 여행에서는 못 돌아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틀란타, 마이애미, 도미니카... 기나긴 여정

2월 9일 아침 7시 공항 도착, 10시에 한국을 떠나서 14시간 비행 끝에 미국 아틀란타 공항에 도착하였다. 도착 직전 기장의 마지막 안내 방송에서 아이티 지진난민 구호 의료단이 탑승하였다고 소개를 해주어 조금 으쓱하였다.

미국은 단순히 거쳐가는 곳이지만 손도장과 눈사진을 포함한 입국 수속은 물론, 그 많은 짐을 몽땅 되찾아서 다시 부쳐야 한다. 우리 일행은 모두 2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인하대학교병원의 의료진 외에도 나를 포함한 개인 자원봉사자 4명(이중 의사 2명은 모두 정형외과), 의사협회 직원 등이 일행이었다.

우리 팀이 옮겨가야 할 약품과 장비, 그리고 식료품 등 각종 물품 박스의 수는 모두 80개에 이르므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일인당 4개씩의 박스를 할당받아 카트에 싣고 세관통과 후 먼 거리를 이동하여 다시 부쳐야 했다.

우리 일행인 김 간호사가 비행기 멀미를 심하게 하였기에 공항 내에서 이동하는 동안 그녀의 배낭을 대신 짊어졌다. 그

런 뒤 미국 국내선을 이용 아틀란타에서 마이애미로(멋쟁이 남녀들의 연애의 명소로 알려진 이곳을 그냥 지나쳐야 하다니...)옮겨갔다. 기온이 서서히 높아지고 있음을 느끼며 3시간을 기다린 뒤 해가 질 무렵 세 번째 이륙을 하였다.

비행기는 약 두 시간 뒤 우리를 도미니카 공화국의 수도 산토 도밍고에 내려 놓았다. 많은 수의 박스를 다 회수하는 데에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었다.

가까스로 짐을 모두 챙겨서 밖으로 나오니 밖은 밤 10시. 밤이었지만 우리나라의 장마철 날씨처럼 후덥지근하였다. 1진과의 짧은 인계 후 한국시각으로는 2월 10일 오후 1시(집을 나선 시점부터 따지면 이미 약 31시간이 경과한 뒤), 드디어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해본다.

옆자리 김 선생은 금새 코를 곤다. 나도 조금씩 잠에 빠져들었다. 불과 두시간이나 잤을까, 요란한 모닝콜에 불려 나온 일행들은 이번엔 낡은 버스에 옮겨 타고 아이티를 향해 출발하였다. 너무나도 짧았던 달콤한 휴식이었다.

새벽 3시 반에 문명세계의 마지막 숙소였던 도미니카 산토도밍고를 출발한 버스는 2차선 도로를 따라 한참을 이동하였고 몇 시간 뒤에 해가 떴다. 차창 밖 도미니카 공화국의 모습은 평화로운 시골모습이었다. 중간에 비포장 구간을 지나는 동안 차창밖은 사물을 분간할 수 없는 먼지구덩이였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늘 먼지를 뒤집어쓰고 살아야 하겠군, 안됐다’라고 생각하는데, 우리 버스 안으로도 엄청난 양의 먼지가 들어차 모두들 호흡곤란 증세에 빠졌다. 버스 바닥이 찢어져서 차 아래로부터 먼지가 그대로 차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덕분에 모두들 잠이 깼다.

도미니카 공화국과 아이티 사이의 국경에는 커다란 호수가 자리 잡고 있었다. 검문소도 여권도장도 출입국 수속도 없이 오로지 물건을 사고파는 장터 같은 곳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에는 육지 국경이 없다는 것이 떠올랐다. 섬나라도 아닌데... 산토 도밍고 출발 후 약 9시간, 우리는 비포장도로 흙먼지 위로 뜨거운 열대의 햇빛이 내려 쪼이는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곳의 첫 인상은 뜨거운 햇살과 먼지, 두 번째 인상은 북적거리는 자동차와 사람들이었다. 거기까지는 지진피해 지역의 느낌이 들지 않았다. 유엔, 적십자 등 국제 구호단체 마크가 그려진 자동차가 많이 보인다는 점은 달랐지만... 조금 뒤 도심으로 들어서자 곳곳의 폐허더미와 아무렇게나 쌓여진 철근고철더미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먼저 우리 팀이 머물 숙소로 향하였다. 단원 모두가 집 떠난 지 사흘이 되도록 아직도 여장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많은 수의 약품, 진료장비, 식량 박스도 빨리 정비를 해야 했다. 때는 낮 12시, 북회귀선 남쪽에 위치한 열대의 나라 아이티의 태양은 파란 하늘 위에서 작렬하고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허허벌판 공사장에 쳐진 우리의 천막 숙소는 가히 찜통을 방불케 하고 있었다. 개인 짐은 물론, 엄청난 수의 박스들을 옮기고 나니 땀이 비 오듯 하였다. 이곳에서 열흘 가까이를 묵어야 한다는 사실이 암담하였다.

숙소는 한국의 한 건설회사에서 잡아 놓은 부지였으므로 그야말로 흙바닥 벌판이었고, 전기도 수도도 없었다. 전기는 기름을 사다가 돌리는 발전기에 의해 야간에만 조금 쓸 수가 있었고, 물은 급수차로부터 받아서 큰 통에 담겨져 있는 것을 갖다가 바가지로 퍼서 쓸 수 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짐 정리가 끝나자 진료장소로 답사를 떠났다. 숙영지까지 이르는 길이 포르토프랭스로의 진입로였다면 숙영지에서 약 20분 간 이동하는 병원까지의 길은 마침내 아이티 국민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낮에도 치안이 나빠서 도로에 사람들이 나설 수 없었다가 이렇게  안정된 것이 불과 일주일 전이었다고 한다). 이동하는 중간 곳곳에서 무참하게 주저앉은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인간의 힘으로 파헤치기엔 너무도 많은 수의 폐허들을 보며, 아직도 저 아래에는 많은 사체가 들어있겠구나 생각하니 참으로 답답하였다. 그렇지만 도로에는 또 많은 생존자들이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살아남았음을 기뻐하고 있을까? 아님 가족과 친구를 잃은 슬픔과 무너진 도시에서의 삶의 고통 속에 마지못해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주민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눈빛은 일견 평상적인 모습인 듯 싶었지만 자세히 보면 그 속에는 체념과 피로, 그리고 낯선 이방인에 대한 호기심과 적개심이 섞인 듯한 묘한 느낌이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아이티 사람들에게 동양인은 정말로 보기 드문 희귀한 존재였을 것이다. 흑인과 백인,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의 메스티조만이 그들이 볼 수 있었던 인간종류였을 것이다. 아이티란 곳이 우리에게 세계지도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낯선 나라였던 것 만큼이나 그들에게 한국은 본적도 들은 적도 없는 나라였으리라. 

활기를 찾기 시작하는 거리. 벽돌을 이고 어디로 가는 것일까?

폐허 앞을 걸어가는 생존자들

앞으로 진료지로 사용하게 될 De La Paix 병원을 둘러보고 진료공간을 정리하였다. 우리의 진료 공간은 병원 건물 일층의 그늘로 그리 넓지는 않았으며 3등분하여 바깥쪽 1/3은 쿠바 의료진(대부분은 의대생)이 사용하였고, 그동안 나머지 2/3를 한국이 사용하다가 캐나다가 들어오면 그 중 반을 내주기로 했다고 한다. 나는 정형외과 김관수 선생과 함께 진료공간을 어떻게 꾸밀 지 의논하였다.

정형외과가 가장 환자가 많은 과인 만큼 잘 준비해야 했다. 게다가 캐나다 팀이 가운데 1/3을 사용하기로 했다하니 공간을 이전보다 축소해야 했고.. 무엇보다도 우리 진료공간에 전기가 없다는 점과, 기대했던 것과 달리 병원에서 수술은 물론 X-ray촬영조차 불가능하다는 게 답답했다.

그렇다면 정형외과 의사로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무엇이든 해야 하겠기에 일단 석고용 공간과 처치용 공간으로 나눠서 준비하였다.

여러 날에 걸친 여행과 더위는 많은 이들을 지치게 하였다. 우리와 동행한 EBS교육방송의 양PD는 아예 병원 답사에 참석도 못한 채 찌는 더위 속 숙영지 텐트에 지친 몸을 눕혀야 했고, 진료소에서도 단장인 인하대 마취과 이홍식 교수가 진료대기용 의자에 앉아 조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나 역시 진료소 정비를 마치고 숙영지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깜빡 잠들었는데 그새 깊이 잠들었었는지 내릴 때는 누가 깨워줘야 했다. 비행기를 세 번 갈아타고, 짙은 흙먼지가 바닥에서 피어오르는 버스를 타고 아홉 시간을 달려와야 했던 머나먼 곳, 시차는 열 시간, 찌는 더위 속에 전기도 물도 없는 그곳이 다시금 나의 현실로 다가왔다.

숙영지의 높다란 담장 넘어 아이티에서의 첫 일몰은 매우 아름다웠다. 해가 지자 낮의 뜨거운 더위도 서서히 가시기 시작하였다. 이제 민생고를 해결할 시간이다. 인간이 하루하루 살아가기 위해 해야 하는 일들...

민생고: 하루하루 살아가기

이곳에서는 그 어느 하나도 쉽지가 않다. 먹는 것은 한국에서 공수해 온 인스탄트 음식들로 해결하였다. 그동안 외국 여행을 가는 경우, 한국음식을 왜 먹나 현지 음식을 먹어야지라고 늘 주장해오던 나였지만, 이번만은 예외였다.

일단 20여명의 외국인이 식사할 만한 현지 음식점이라는 것은 아예 없었고, 또한 위생 상태로 보아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게다가 치안은 여전히 확실치 않았기 때문에 단독으로 혹은 몇몇이 밖으로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우리 숙영지는 높은 담에 둘러싸인 사각형의 벌판이었고, 유일한 출입구인 철제 대문은 장총을 든 수명의 현지인들의 통제 하에 열리고 닫혔다. 그러므로 모든 생활은 오로지 그 안에서만 가능하였다. 

인간의 삶의 가장 기본이 되는 물... 이곳에 수도나 펌프는 없었다. 우물도.. 그러므로 물이라고는 급수차로부터 배급되어 큰 물통에 옮겨져 있는 것 뿐이었고, 누군가는 물통 뚜껑을 열어본 뒤로는 그 물을 마시는 것은 물론 씻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고 한다. 식자우환, 모르는 게 약이다. 

숙영지 텐트 옆에 물을 끓일 수 있는 가스불이 준비되어 있어서, 햇반과 컵라면 등의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캔에 들어 있는 한국 음식들(장조림, 스팸, 깻잎)과 봉지에 들어있는 김으로 우리의 모든 식사는 이어졌다. 점심식사 역시 같은 메뉴로, 병원 앞 큰길 건너에서 대기 중인 버스 좌석이 우리의 점심 장소였다.

외국 여행에서의 배변은 늘 어려운 숙제이다. 시차가 맞지 않는 상태에서 바쁘게 이어지는 일정으로 인해 배변 리듬을 잃고 변비라는 달갑지 않은 이름을 벗 삼아야 하는 것이 다반사이다. 나는 해외여행을 떠나 현지에 도착한 뒤, 아님 마치고 집에 왔을 때 배변리듬이 회복된 것을 시차적응 시점이라고 나름대로 정의한 바도 있었다.

그곳에는 높은 담벼락 아래 5개의 간이 옥외변소가 세워져 있었다. 두 개는 나머지 세 개와 약간 거리를 두고 있는데 이것은 여성용이다. 조명도 없고, 보안도 취약한 간이 변소는 불안감을 줄 요소가 많았으므로 처음 며칠간 많은 단원들이 변비로 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 

씻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었다. 씻을 수 있는 곳이라곤 전기도 없는 좁은 천막 공간 하나 뿐이었다. 그곳에 큰 물통이 두 개 있고, 그 위에 놓여있는 바가지로 물통에서 물을 퍼다가 적당히 씻는 것이었다. 동시에 세 사람은 씻을 수 없을 만큼 좁은 공간, 물은 늘 부족하였고 게다가 늘 깨끗하지 않았다.

첫날은 이러한 불편이 익숙치 않아서 고양이 세수만 하고 잤다. 그렇지만 낮 동안에 땀과 먼지에 절어있는 육체는 늘 물을 요구하였기에 둘째 날부터는 부족한 물로나마 어떻게든 몸을 씻고 머리도 감았다. 왜냐하면 낮에 종일 진료하느라 땀과 먼지에 절은 몸을 부족하나마 물로 씻고 나서 저녁 바람에 말리는 것이야말로 그곳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이었기 때문이다.

대형 텐트 하나 당 7개 씩 놓인 야전 침대가 우리의 잠자리였다. 남자 셋만 모이면 그 안에 반드시 코 대포가 있다는 진리는 이곳에서도 성립하였다. 게다가 피곤하면 대포의 위력은 더욱 막강해진다. 다른 이들도 낮의 피로를 씻을 깊은 잠이 필요했지만 대포는 그 정도로 이타적이진 않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모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숙영지는 목초지에 둘러싸여 있었다. 아침에 숙소를 나서서 병원으로 향하는 길에 목초지를 향해 느릿느릿 걸어가는 소떼들을 보면서 포르토프랭스는 참으로 목가적인 수도라는 느낌도 가졌었다. 그러나 모기의 공습이 시작되고 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우리끼리 농담처럼, 아시아에서 맛있는 피가 왔다고 모기들 사이에 소문난 것 같다고 했지만, 정말로 날이 갈 수록 모기의 수는 엄청난 증가를 보였고, 나중에는 모기 이외에도 수많은 종류의 날곤충들이 모여들었다.

우리들의 저녁 식사 시간은 모기들에게도 역시 즐거운 식사 시간이었다. 식사를 조금 여유있게 하다가는 섭취한 영양분의 일정부분에 해당하는 혈액을 이곳 모기에게 헌납해야만 했다.

게다가 모기가 밥이고 반찬이고 가리지 않고 침투했기 때문에, 어두운 조명 덕에 못 보긴 했어도 매 끼마다 모기 몇 마리씩은 먹었을 것이다. 다들 표현은 안 했지만 모기로 괴로움을 겪는 모습들이 역력했다. 말라리아 약을 거르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진료소 업무

첫날 출근하여보니 진료소로 쓰고 있는 공간 전체를 사람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1진의 노고 덕에 한국 의료진에 대한 입소문이 많이 나있었던 상황에서 1-2진 사이에 하루 반의 진료 공백이 있었던 때문이다(이후로는 다음 의료진과 진료소에서 인계를 하게 되었다).

정형외과에서는 전임 1진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이 지진이 나던 당시에 다친 팔다리의 외상 환자가 주종을 이뤘다. 이후 4주 가까이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여 벌어진 채로 방치된 상처들이었다. 그 벌어진 피부사이로 육아조직과 염증조직이 자라 올라오고 있었다.

그 상처들은 그렇게 드레싱만 하면서 세월을 보낼 경우, 흉터가 심하게 남음은 물론, 흉터조직으로라도 완전히 아물려면 몇 개월이 걸릴 것 같았다. 지금 시점에서 이를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를 고민한 결과 결국은 그동안 생겨난 흉터나 육아조직을 제거하고, 가급적 원래의 피부끼리 봉합해 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다행히 우리 팀에는 1진이 남겨놓고 간 수술도구와, 드레싱 장비가 충분하였다. 통역의 도움을 얻어서 왜 상처를 봉합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 후 국소 마취 하에서 ‘변연절제에 이은 창상봉합’ 처치를 하기 시작하였다.

환자들은 마취 주사와 이후 처치에서 오는 고통으로 신음, 혹은 비명을 질렀지만, 치료를 마치고 상처가 봉합된 것을 볼 때는 매우 만족하는 모습이었다. 첫날 하루에만 20명 가까운 환자를 봉합했던 것 같다. 현지인들은 이와 같은 외과적 시술을 경험하지 못하였었는지, 놀라움이 꽤 컸던 것 같다.

심지어 우리 진료단들조차도 정형외과에서 이렇게 많은 환자를 마취 하 시술로 치료하는 것에 대해 적잖은 놀라움과 경의를 표현하였다.

경험이 적은 의사였다면 이러한 결정을 내리고 시술을 시도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위로와 찬사를 보내는 이도 있었다. 첫날 저녁 내내 일행들로부터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인사를 들었다.

그렇지만 뭘 해줘야 할지 난감한 환자들도 참으로 많았다. 특히 뼈에까지 감염이 파급된 골수염 환자들의 경우는 뼈를 긁어내서 일단 염증을 없애고, flap이나 피부이식을 통해 상처를 덮어야 할 상황이었다.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장에서 필요한 조치를 해줘야 하는 사람들이지만, 그 어느 하나도 그들에게 해줄 수가 없었다. 얼굴 옆이 크게 갈라진 꼬마 아가씨도 참으로 안타까웠다.

전신 마취하에 성형외과에서 얼굴 상처를 다시 손봐야 할 상황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 한쪽 다리는 절단되었고, 남은 다리는 서혜부에 고관절 앞으로 크고 깊은 통로가 형성된 어린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진료실에서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깊은 통로를 소독약으로 닦아주는 것... 그 소독조차도 그 아이에게, 그리고 누군지 모를 보호자에겐 크나큰 고통이었다. 우리에게 진료를 받으러 온 사람들은 대부분 가족을 잃었다. 언어 소통이 안 되어 몰라 그렇지, 부모 and/or 형제를 잃은 아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가족을 잃고 팔, 다리를 잃은 아이들... 고름이 멎지 않는 상처를 보면서, 이 아이의 일생에 걸쳐서 지진의 상처가 깊게 남겨질 것이라는 생각에 맘이 아파왔다. 

 Rapport를 위한 수다

환자는 누구나 의사로부터 관심을 받길 원한다. 아무런 대화도, 눈빛 교환조차도 없이 기계적으로 상처소독만 하고 간다면 그들 마음에는 허전함이 남을 것이다. 말이 안 통하는 환자들과 의사소통을 어떻게 할 것인지, 의사-환자 관계를 어떻게 이룰 것인지는 참 어려운 문제이다.

그렇지만 외과적 치료를 많이 받아보지 못한 그들이기에 상처봉합을 잘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들과 좋은 라포를 형성해야 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우리에겐 영어통역이 있었다. 물론 그들과의 영어 대화도 서로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정형외과 전담 통역인 Simon에겐 미안했지만 이러한 관계의 성립을 위해 많은 대화를 시도하였다. 특히 그들을 기쁘게 해주려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하였다. 젊은 여자에게는 흑인 최초 여우주연 아카데미상에 빛나는 할리우드 배우 할 베리를 닮았다고 이야기해주어 그녀를 웃게 만들었다.

그 아가씨는 할 베리란 배우의 이름조차도 몰랐지만 미국의 유명 여배우를 닮았다는 말만으로도 조금은 그 아가씨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다리에 있었던 10cm가량의 길고 깊은 상처를 봉합하는 과정에서 이와 같은 행복감과 웃음이 훌륭한 마취약이 되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내가 열심히 수다 떠는 이야기를 들으며 밝은 표정이 되었다. 내가 말한 영어를 통역이 크레올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정확하게 뜻이 전달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엄지손가락을 봉합해야 했던 8세 소년에게는 통역을 통하여 ‘내가 만난 아이티 남자 중에서 가장 잘 생겼다, 앞으로 용감한 전사(warrior) 혹은 장군이 될 것이다’라고 이야기하였다. 나의 담당 통역은 이러한 말들까지 통역해야 했으므로 아마 격무에 시달려 지쳤을 것이다.

나를 원망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러한 수다 덕인지 그 소년은 엄지손가락 봉합이 끝날 때까지 신음소리 한번 안 내고 잘 참았다. 

 간혹 영어가 조금 통하는 환자가 오면 가능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대화들은 분명히 의사-환자 관계를 가깝게 함은 물론, 그들의 고통을 조금은 덜어주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언어가 안 통한다고 대화를 포기하고 말없이 처치만 해주는 것 보다는... 어느 환자이든 하나의 인격체이다. 의사의 눈에는 앞에 있는 그의 환부만이 처리해야 할 업무로 보일지라도...

레베카

내가 치료했던 많은 환자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가 레베카이다. EBS 방송에도 그녀의 이야기가 가장 많이 나왔다. 여고 3학년인 그녀는 지진과 함께 무너진 학교 건물아래에서 3일을 깔려 지내야 했다. 부모는 학교붕괴현장에 와보고는 딸을 잃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기적적으로 살아난 딸을 만났을 때 그 부모는 사흘 만에 부활한 예수님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딸에게는 몇 군데 심한 상처가 나 있었다. 특히 오른쪽 대퇴부 위쪽으로 약 15 x 8 cm 가량의 깊은 상처 속으로 피하 지방이 드러난 채로 한 달을 지내고 있었다.

처음엔 수술이 가능한 병원으로 보내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우리 진료팀 간호사가 “다른 곳에 보낸다고 해결되겠어요? 우리가 해요” 하긴 한 달을 이렇게 지내온 이유가 다른 병원을 몰라서 그랬던 것은 아닐 것이다.

설령 수술이 가능한 병원이 밖에 있다 하더라도 가자마자 어서옵쇼하고 수술장에 들어갈 수 있을 것도 아니고... 다른 곳으로 보낸다고 해결이 되지 않을 바에야, 조금 무리스럽더라도 우리 손으로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범위한 부위에 국소마취 주사를 놓아준 뒤 피하에 노출된 채 4주동안 방치된 피하 지방 조직을 충분히 제거하였다. 그런 뒤 땡겨지는 데까지 양쪽 피부를 땡겨서 봉합을 시도하였다.

일부 구간은 5 mm 이상의 간격이 남긴 했지만, 수술 전보다는 그래도 사람다리같이 되었다. 봉합 철사가 없는 게 너무도 아쉬웠다. 그 외에도 작은 상처 서너군데를 더 봉합하고 나니 한 시간도 넘게 시간이 흘렀다.

그 덕분에 진료팀 전체가 종료시간이 늦어졌지만, 시술을 마치고 항생제 주사를 맞고 있는 그녀의 표정은 처음보다 많이 밝아져 있었다. 수술 내내 그녀의 아버지가 딸을 부둥켜안고 있었다. 그 아버지의 마음이 어땠을까.. 나도 같은 나이의 딸을 둔 아버지로서 충분히 동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시간을 고통에 피땀흘리는 딸을 부둥켜안고 꼼짝 못하고 땀흘려야 했던 아버지... 그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수술 외에 하나가 더 있었다. 바로 부채질.... 더운 나라에 가는 만큼 지난 해에 주례를 선 뒤 신부 어머니로부터 선물 받은 동양화 부채를 갖고 갔었다.

이 부채를 이용하여 주사 맞느라고 누워서 땀 흘리는 레베카를 열심히 부쳐줬더니 부채에 호기심을 갖는다. 통역의 말이 그녀가 그 부채를 갖고 싶다고 한다.

그때는 더위 때문에 밤낮으로 부채 없이는 생활이 어려운 상황이라 당장 줄 수는 없고, 마지막 치료 날에 주겠다고 약속을 하였다.

그 이후로 레베카는 매일 찾아왔다. 작은 상처들은 어느새 꽤 아물었고, 큰 상처도 더디지만 회복되고 있었다.

부채를 들고 기뻐하는 레베카와 고름맨 사이에서

그리고 마지막 치료 날, 약속대로 그 부채를 레베카에게 선물로 주었다. 할 수 있다면 더 오래 남아서 그녀의 육체의 상처가 그리고 마음의 상처가 다 낫는 것을 보고 싶었다. 아니 그 상처가 다 낫도록 나의 힘을 더 나눠주고 싶었다.

그러나 나의 몸은 정해진 일정 상 그곳을 떠나와야 하는 입장인지라 대신 부채를 남겨두고 온 것이다. 그녀도 부채를 볼 때마다 나를 떠올릴 것이다.

다리 봉합 전 국소마취

고름 맨

 첫날 만난 또한 사람의 큰 환자는 30 전후로 보이는 어른 남자였다. 그는 고통으로 인하여 걷지를 못하는 상태였다. 살펴보니 오른쪽 넓적다리가 반대편의 1.5배는 될 정도로 굵어져 있었다. 그 내용물이 뭐가 됐든 그 정도 부피가 되었다면 가히 살인적인 고통이었을 것이다.

통역에게 우선 주사로 빨아본 뒤 조금 째서 치료하겠다 라고 미리 설명하고 나서 가장 아픈 부위를 주사로 찔러보니 고름이 나왔다. 피부 국소마취 후 칼을 집어넣자마자 연두빛이 섞인 누런 색의 고름이 꿀꿀꿀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큰 거즈로 닦아내기를 수십 차례, 아마도 첫날 제거한 고름의 양만 2-3 리터는 족히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부위에서 약 20cm 위 엉덩이 아래에도 또 다른 종창 부위가 있었다. 이곳 역시 칼을 넣어 째보니 고름이 쏟아져 나온다.

양은 처음 짼 곳보다는 적었지만...  약 30분에 걸쳐서 엄청난 양의 고름을 빼낸 뒤 피부가 막히지 않도록 심지(drain)을 넣어주었다. 우리 의료진들도 막대한 양의 고름이 나오는 것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며 주저없이 시술(I & D)하여 고름을 빼낸 것에 대해 찬사를 보내왔다.

이러한 경험은 25년 전 무의촌 시절에 적잖게 해봤기 때문에 나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심지를 박아놓지 않으면 피부가 금새 막혀서 배농이 안 된다는 것도 오랜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이 남자는 다음날에도 찾아와서 또 많은 양의 고름을 빼고 갔다.

그러나 그의 통증은 한결 가라앉아 있었다. 워낙 고름집이 컸기 때문에 고름이 안 나오기까지는 여러 날이 걸렸다. 마지막 진료 날 그가 내게 해준 말을 잊을 수가 없다. “처음 이곳에 올 때 나는 너무나도 큰 고통으로 걸을 수 없었다.

점점 심해지는 다리를 보며 곧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첫날 고름을 빼낸 뒤로 희망이 생겼다.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거의 다 나은 것이다.  당신은 나의 생명을 구해주었다.  한국에 가지 말고 아이티에 계속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나의 대답: “나도 카돌릭 신자로서 당신을 만난 것이 하느님의 큰 뜻이라고 생각한다. 그 덕에 내가 이곳에 오게 됐고 여기서 우리가 서로 만나게 되어 이렇게 좋은 결과를 얻게 된 것에 감사한다. 당신의 다리가 많이 나아져서 나도 행복하다.

그러나 한국에는 나의 가족이 있다. 그러므로 나는 한국에 돌아가야 한다”
고름 맨: “그럼 일단 한국에 가서 가족들 만나보고는 바로 아이티로 돌아오도록 해라”
의사로서 이토록 나를 원하는 환자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

나중에 그가 완치되어 건강한 모습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들었다. 나에게 그는 또 하나의 큰 선물이었다.   

예방접종, 도시를 돌며

예방접종은 국제적십자사에서 직접관리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사업이었다. 물 공급을 포함 먹는 문제와 위생처리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은 채, 수 천명 씩 모여 살아가는 난민 캠프는 전염병이 언제 터질 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다.

특히 저항력이 낮은 소아들은 한번 전염병에 노출되면 지진에 이은 또 하나의 대참사가 야기될 수 있다. 그러므로 예방접종 사업은 매우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너무나 많은 수의 난민들을 동시에 예방접종을 실시할 수도 없다.

하루에 실시할 수 있는 접종 인원은 최대 1500명... 매일 그 인원을 접종한다 해도, 150만명으로 추산되는 난민들을 모두 접종하려면 1000일이 걸린다. 적십자사에서 택한 방법은 현지의 예비의료인(의대생, 간호대생)들에게 예방접종을 교육하여 그들이 직접 실시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프랑스, 캐나다,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 등 각 나라에서 온 적십자요원들로 구성된 백신 팀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현지인들이 예방접종을 시행할 수 있도록 교육, 감독, 지도하는 역할이었다.

8만명으로 추산되는 펜빌의 난민촌

현지의료진 중심의 예방접종 사업

아이티의 날씨는 건기라서 습하지는 않았지만 매일 매일의 기온이 우리나라의 8월 초에 해당하는 뜨거운 날들이었다. 이 더운 날씨에 쓰레기가 산더미같이 쌓여있는 악취 속의 난민촌 언덕길을 몇 백 미터씩 오르내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게다가 내가 신고 간 샌들의 끈이 끊어져 남들의 걸음 속도에 맞춰 걷는 것이 힘들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하루의 고통이지만 그곳 주민들이나  진료 등 각종 구호사업을 하고 있는 봉사자들은 매일의 일상이라는 점을 생각하며 잘 참기로 하였다. 덕분에 미국, 독일, 이탈리아 등 여러 나라의 이동진료소를 둘러볼 수가 있었다. 여건은 모두 비슷하였고 어디든 마취를 제대로 걸고 수술을 할 수는 없는 상태였다.

우리나라 의료진처럼 국소마취하에 수술하는 모습조차도 다른 곳에선 볼 수 없었다.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본 것 중 하나는 엄청난 수의 난민이 있는 것 만큼이나 세계 각 나라에서 온 구호단 또한 엄청난 수라는 것이다.

마을마다 난민들을 위하여 내외국인들이 여러 가지 구호활동을 하고 있었다. 미국팀이 자리잡은 곳은 내가 본 중 가장 큰 난민촌으로 약 8만명이 모여 사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는데, 미국의 영화배우 숀펜이 직접 다녀가기도 하였고 아마 지원도 많이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들은 그 마을 이름을 펜빌이라고 이름지었다 한다. 돌아온 뒤에야 들었는데 우리가 머무는 동안 한때 가수 마돈나도 아이티에 다녀갔다고 한다. Noblesse Oblige라고 해야 하나? 

 현지 의대생과도 대화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들의 학교가 모두 무너지고 교수도 다수 사망하거나 잠적하여, 의과대학을 3년간 휴교하기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그 입장이 되면 얼마나 기가 막히겠는가..

설lentine Day

2월 14일은 민족의 명절 설이다. 아침 식사 때 단원들끼리는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하고 인사를 나눴다. 게다가 올해는 설날이 발렌타인데이인 동시에 일요일이기도 하다.  한국에 있었으면 여러모로 억울했을 텐데, 아이티에서는 여느 날과 같은 하루일 뿐이었다.

나는 카돌릭 국가에 와 있으면서 일요일에 미사를 하지 못하는 것이 억울하였지만, 성당 미사보다는 진료실에서 환자들과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미사의 정신에 맞다는 생각으로 아쉬움을 잊었다.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양을 구하는 신약의 비유를 떠올리며.... Valentine day는 만국공용이라서 아이티에서도 초콜렛 등 선물을 준다고 한다. 다만 한국과 다른 점은 그들은 남자가 여자에게 선물을 준다는 것이다.

설날이지만 하루 일과는 똑같이 시작되었다. 고름 맨은 오지 않았다. 일요일이자 추모기간의 마지막 날이라서 환자가 적을 것이라는 예측이 있긴 했다. 레베카에게는 Valentine day선물로 초콜렛 대신 고통을 한번 더 주었다. 상처를 다시 한번 보다 완벽하게 봉합해준 것이다.

그래도 첫날 보다는 덜 힘들어하는 것 같다. 말은 안 통하지만 그것이 서로에 대한 Valentine 선물이라는 마음이 통했을까? 그렇지만 슬픈 발렌타인데이를 보낸 사람들도 있었다. 어느 애기엄마는 오른쪽 눈꺼풀이 찢어져서 봉합을 해 주었다. 어떻게 다쳤냐고 물어보니 남편 친구에게 주먹으로 맞았다 한다.

이유를 물어보니 그들은 남편친구 집에 세들어 살고 있었는데, 집세 문제로 다투다가 집주인인 그가 주먹을 휘둘렀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떤 인간이 이런 짓을 할 수가 있냐고 개탄하고 있는데, 옆에서 진료중인 손등뼈 골절(일명 Boxer 골절)환자가 바로 그 집주인인 남편 친구라는 것이다. 

우리 팀 한 간호사는 벌 받았다며 쌤통이라고 표현하였지만 나는 둘다 안 돼보였고 이렇게 Valentine day에 서로의 몸에 그리고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받게 된 두 사람을 동시에 보며 마음이 아팠다.

이날 만난 15세 소녀는 온몸 여기저기가 아프다며 계속 자신의 불편을 호소하였는데, 자세히 보면 정말 아픈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불편하다는 것을 남에게 알리려는 듯한 인상이 들기도 하고 어떤 땐 약간 정신이 멍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으며, 표현이 두서가 없었다.

치료해야 할 환자가 밀려있는 상황이라 처음엔 이러한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이 시간이 아깝고 귀챦기도 하였으나 끝까지 잘 들어주고 약도 처방해 주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그녀의 가족 8명이 모두 지진으로 사망하고, 그 어린 여학생만 홀로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모든 가족을 한순간에 잃은 사춘기 아가씨임을 알게 되자 마음이 아팠다. 오히려 슬픔에 울고 있는 모습보다 그렇게 약간 정신 나간 사람처럼 쉴 새 없이 이야기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더한층 무겁게 마음속 한편으로 파고들어왔다.

가족 한명만 잃어도 그 슬픔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 할 텐데 아홉 식구의 대가족에서 혼자만 남다니... 뿐 아니라 그 어린 나이에 무엇을 먹고 어디에서 자며 누구를 의지해서 살아간단 말인가...

 진료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왔을 때, 비록 지구 반대편에 떨어져 있지만 나에게는 가족이 있음이 새삼 감사하게 느껴졌다. 설날 저녁은 그렇게 사랑하는 가족을 그리며 잠들었다.

To be Global...

아이티에서 우리나라 의료단만 떨어져서 따로 활동한 것은 아니다. 우선 평화대학병원 진료소의 한쪽에는 쿠바의료진이 묵묵히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예방접종에서 만난 여러나라 대표들도 있고, 시내 곳곳에는 여러나라의 적십자 캠프들이 있었다. 물론 모든 대화는 영어였다.

유럽 사람들끼리는 불어나 다른 언어가 편했을 텐데, 나나 일본 대표를 위해 그들은 굳이 영어로 대화하였다. 외국인들과의 영어 소통은 쉽지 않았다. 내용을 잘 모르는 경우도 있었지만, 각 국적의 사람들이 자기 식으로 발음하는 영어이기 때문에 알아듣는 일이 쉽지 않았던 것 같다.

특히 프랑스에서 온 백신팀 대표 베누아는 40전후의 쾌활한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목소리가 작은 데다가 영어발음마저 불어식 콧소리에 흐릿하고 빨라서 참으로 알아듣기 어려웠다.

그의 말을 힘들여 따라가고 있노라면 어느새 그는 웃으며 나의 반응을 보는 것이었다. 그 나름대로는 매우 재미있는 말을 마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웃음에 전혀 동참하지 않는(못 하는) 나의 표정에 가끔 실망하는 모습을 볼 수도 있었다.

2월 14일 일요일에 캐나다 팀이 왔다. 예정대로 진료소의 3분할이 필요해진 것이다. 문제는 3개국이 각각 따로 일을 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의 다국적팀을 형성할 것이냐가 남았다. 직능별로 하나의 팀을 이루면 가장 이상적이긴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음날 아침에도 이에 대한 논의만 하고 있기에 나부터 우선 진료를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그런 일이 미리 의논해서 정한다고 답이 찾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진료가 시작되고 나자 모든 일은 물 흐르듯이 해결되었다. 캐나다팀은 원래 평화대학병원과 자매결연관계를 갖고 있었고, 우리처럼 한 달 짜리 단기 진료단이 아니라 1년 혹은 그 이상 이어지는 장기 진료단을 구성하였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의료인력과 약품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진료에 필요한 엑스레이나 수술 장비까지 갖춰서 들어온다는 것이다. 의료진도 정형외과 전문의 3명에 성형외과 1명, 응급의학과 2명 등 지진지역 난민 구호에 걸맞는 호화 진용을 자랑하였다.

한국 의료단은 한편으로는 수술할 환자를 이 병원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겨서 좋았지만, 진료의 주도권을 캐나다에 뺏기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었다. 나는 어차피 우리는 4주짜리 임시 진료팀이고 캐나다는 1년 이상의 장기적인 계획을 갖고 있으므로 결국은 캐나다가 진료를 주도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우리가 난민 구호를 위한 의료단을 구성해야 할 상황이 온다면, 캐나다처럼, 인력과 물자를 충분히 장기적으로 공급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알게 된 것인데, 어떤 나라들은 재난지역 구호에 필요한 모든 장비와 재료를 컨테이너에 넣어 아예 국제공항에 항상 대기시켜 놓고 있다가, 유사시에는 바로 비행기에 실어서 재난지역으로 옮긴다고 한다. 의료단과 약품 만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캐나다 의료진도 의사와 장비는 멋지게 왔지만, 현실적으로는 썩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우선 마취과 의사가 수술 준비를 하질 못하여 한국 의료단 단장인 마취과 이홍식교수가 첫 수술 때 전신마취를 해줬다.

또한 캐나다 팀이 오고 난 뒤에도 여전히 X-ray는 불가능하여, 한국 의료단의 노련한 오상조 방사선사의 노력 덕에 낡은 X-ray장비로 촬영 후, 구식방법(현상액에 담그는)으로 한 장당 25분이 소요되는 방사선 검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이 그 병원에서의 유일한 X-ray였다. 장비를 갖춘다는 것이 말만큼 쉬운 일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나중에 들으니 캐나다 팀은 일주일 만에 철수했다고 한다. 무엇이 문제였는지는 모르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매일 200여명이 몰려드는 진료실 접수광경

캐나다, 쿠바 의료진과의 협진

다음은 누구에게로?

마지막 날의 오전 진료도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많은 환자가 와 있었다. 우리 2진의 일행인 정형외과 김관수 선생이 2진부터 4진까지의 모든 진료에 다 참가한 뒤 귀국하기로 하였기 때문에 정형외과 환자의 인계는 큰 어려움이 없었고 내가 보던 큰 환자들은 모두 김 선생이 보기로 하였다.

3진이 예상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진료소에 나타났다. 그들도 장시간의 여행으로 몹시 지쳐있었겠지만 정신없이 일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자 빨리 인계를 받겠다며 각 부서별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정형외과는 두 명의 전임의가 왔기 때문에 김 선생과 함께 3명의 막강 팀이 구성되었다.

진료소에 와 있는 환자들에 대해 하나하나 인계해주고 마지막으로 나의 붕대 가위를 넘겨주었다. “이거 우리 OS의 M16소총이에요” 붕대 가위는 수련의 시절 그것도 1,2년차 시절에 주로 썼을 뿐, 이후로는 내가 직접 쓸 일이 별로 없었던 도구이지만, 이번에 준비과정에서 혹시나 해서 챙겨 넣었던 것인데 아이티 진료소에서 가장 유용하게 많이 쓰인 물건인 셈이다.

드레싱을 하기 위해서는 기존에 해 놓은 드레싱을 풀어야 했으므로, 대부분의 환자에서 처음 내가 사용해야 했던 도구가 바로 이 붕대가위였다. 나에게 몹시도 유용했던 정든 가위였지만, 그 가위가 있어야 할 곳은 내 배낭속이 아니라 새 의료진의 정형외과 의사의 손이라고 생각, 그에게 넘긴 것이다.

이렇게 내가 보던 환자들도, 붕대가위도 모두 다음 진료진에게 넘기고 버스에 올라 아이티를 등지고 도미니카 공화국을 거쳐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내 다음 의료진 역시 일주일 뒤에는 그들의 환자와, 어쩜 붕대가위도 그 다음 진료팀에게 넘겨주고 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은 없다. 한국의료단은 4진까지만 파견되었기 때문에 4진은 환자나 가위를 넘겨줄 곳이 없다.

바람직하기로는 현지 의료진(아이티 의사들)이 4진으로부터 모든 환자와 장비를 잘 넘겨받아 자기나라 국민들을 잘 치료해 주는 것이겠지만, 현실은, 실상은 어땠는지 나는 모른다. 그저 그랬기를 바랄 뿐...  물론 떠나오는 날까지 나는 아이티 의사를 본 적이 없었지만... 아이티의 상처는 언제면 다 봉합이 될까? 
 
아이티는 현재 진행형이다.

 ‘그를 빨리 만나야 한다.’ 폐허 속 낯선 도시의 숱한 교차로를 지나며, “어느 모퉁이였지?  그가 없으면 어떡하지?” 애타게 그를 찾는다. 그는...  내가 찾는 사람이기도 하고 나를 찾는 사람이기도 하다. 꿈을 깨보니 그 숱한 교차로는 아이티 포르토프랭스의 거리들이었다.

아이티를 떠나온 지 열흘이 넘도록 매일 밤 꿈속에 그곳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가 떠나온 뒤로도 아이티 현지의 고통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부채와 함께 그곳에 남겨 둔 나의 마음이 꿈에라도 나를 그들 곁으로 부르는 것일까?

서서히 아이티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 원래의 일상으로 복귀하고 있을 때 이번에는 칠레에서 또 다른 지진의 소식이 들려왔다. 물론 이번에는 내가 갈 수 없다. 그러나 지진을 포함한 자연의 재앙은 줄을 이을 것이고 삶과 꿈이 무너진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은 계속 필요할 것이다.  

앞으로 또다시 같은 기회가 찾아온다면 나는 제 2, 제 3의 아이티로 떠날 것이기에...
아이티는 내겐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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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중근 2010-05-07 12:25:47
선생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저는 글로벌 케어를 통해서 다녀왔는데 선생님에 비하면 정말 호강하고 온 것 같네요. 선교사 댁에서 머물면서 물은 모자라지 않게 썼거든요. ;;
정형외과가 정말 많이 필요할 거 같던데 정말 필요한 치료를 해주시고 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장기 의료 봉사가 필요하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정말 동감합니다. 다들 한국에서 바쁜 삶이 있어서 단기간만 가능하기에 아쉬웠습니다.

박동규 2010-05-06 00:17:59
선배님의 글을 읽고 현지의 어려움과 고통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사명감으로 봉사하신 선배님 존경합니다.
선배님께서 베푼 사랑이 아이티의 많은 사람들 입으로 회자 될 것입니다.
항상 주님의 사랑이 함께 하길 소원합니다.

* 기사속 광고는 빅데이터 분석 결과로 본지 편집방침과는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