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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story"전문과목을 숨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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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신정 기자 ksj8855@doctorsnews.co.kr
  • 승인 2010.04.30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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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원전문의 5명 중 1명 전문과목 미표시
외과·산부인과 등 주도…'마지막 돌파구'

Cove Story

외과 전문의 면허를 갖고 있는 A원장은 지난 9월 이른바 '무간판'으로 돌아섰다. 8년 동안 고수해왔던 'A외과 의원'이라는 간판을 버리고 'A의원'으로 변신한 것.

A원장은 "전문과목을 간판에서 지운 뒤 환자는 이전보다 조금 늘었지만, 전공의 시절부터 가슴 속에 품어왔던 '외과의'로서의 자존심을 버린 것만 같아 때때로 자괴감이 밀려온다"고 했다.

외과 등 일부진료과목들을 중심으로 '전문과 미표시' 현상이 꾸준히 확산되고 있다.

오랜 수련기간을 거쳐 전문의 자격을 취득해놓고 개원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전공과목을 포기하는 의원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전공과목이 들어간 'OO과 의원'이란 이름 대신 'OO의원'이라는 간판을 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09년 말 현재 전문과목 미표시 의원은 전국 4835곳으로 집계됐다. 같은 기간 전문의 자격소지자가 개설한 의원급 의료기관의 숫자가 2만4319곳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개원시장에 들어와 있는 전문의 5명 가운데 1명꼴로 개원 때 전문과목을 숨긴 셈이다.

과거에는 전문의 면허를 딴 뒤 이를 숨기고 개원한다는 것을 상상하기 힘들었지만 최근 몇 년 사이 미표시 의원이 개원시장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통계에 의하면 전문과 미표시 의원은 2006년 4308곳, 2007년 4459곳, 2008년 4655곳, 그리고 지난해 4835곳 등으로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전문의 개설 의원 중 미표시 의원이 개원시장에서 차지하는 또한 2006년 18.5%에서 2007년 18.9%, 2008년 19.5%, 2009년 19.9%로 계속 증가하고 있다.<표1>

전문과목 버려야 산다

이들은 왜, 전문과목을 버려야 했을까? 과목별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느 정도 속 사정을 가늠해 볼 수 있다.

현재 전문과목 미표시 현상을 주도하고 있는 분야는 외과와 산부인과 등.


심평원 통계에 따르면 2009년 미표시 의원 4835곳 가운데 가정의학과 전문의가 개설자로 있는 기관이 1538곳으로 전체의 3분의 1 쯤이며, 외과 전문의 개설이 1036곳으로 21.4%, 산과 전문의 개설기관이 555곳 11.5%로 뒤를 잇고 있다.

이들은 지난 수년간 개원시장에서 한파를 겪어왔던 대표적인 '개원 기피과목'이기도 하다.<표2>

진료특성을 감안, 가정의학과는 논외로 치더라도 외과와 산부인과 의사들의 이탈은 개원시장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단 전문가들은 전문과 미표시가 상당수 개원의들 사이에서 장기불황이라는 어두운 터널을 벗어날 '마지막 돌파구'로 인식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

특정과목을 전문으로 표방하는 것보다 오히려 전문과목을 감춘 채 다양한 환자를 받는 것이 경영상 유리하다고 판단, 이를 하나의 전환점으로 삼고 있다는 것. 스스로 전문과목을 포기할 정도로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또 개원가에서는 첫 개원부터 전문과목 표시를 피하는 것보다는, 수년간 전문과를 표방한 채 의원을 운영해온 기관들이 폐업 후 미표시로 재개원하는 사례가 더욱 흔하게 목격된다고 전하고 있다.

상당수 전문의들이 거듭되는 불황과 경영난을 타개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미표시라는 대안을 찾고 있으며, 특히 과거 개원시장 내에서 경영실패를 경험했던 '중견' 개원의들이 미표시로 빠져나가고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개원의가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분야를 스스로 포기했다는 점, 지난 십수년간 통용되어왔던 '전문의=진료를 잘하는 의사'라는 공식을 의사들 스스로 깨뜨릴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은 그 만큼 많은 개원의들이 궁지에 내몰렸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조성문 대한외과개원의협회장은 "시장 환경이 달라지다보니 의원에서 할 수 있는 수술 수요가 확 줄어들었다"면서 "요즘 외과로 개원해서는 먹고 살길이 없다"고 털어놨다.

그는 "과거에는 천공환자 등 의원에서 수술을 하는 사례들이 있었고 한때는 대장항문 수술이 대안이 된 적도 있었지만 병원이 대형화·전문화되면서 이마저도 어려워졌다"면서 "타산이 맞지 않으니 자연히 외과 간판을 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허탈해했다.

탈출구는 되어도, 해결책은 못 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이마저도 개원시장 생존을 위한 절대적인 대안이 되지는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08년 말 기준 전문과목 미표시 의원들의 월 평균 진료비 매출액(비급여 제외)은 기관당 1914만원으로, 의원급 평균인 2526만원에 크게 못 미친다. 2009년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기관 1곳당 월 평균 2047만원의 매출을 기록, 의원급 평균(2748만원) 보다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2009년 기준 전문과 미표시 의원보다 월 평균 매출액이 낮은 곳은 결핵과와 병리과·비뇨기과·비급여 진료가 많은 성형외과 정도다.

또 진료비 크기별로 의원급 의료기관을 구간별로 나눠본 자료에서도 미표시 의원 10곳 중 7곳이 진료비 매출 최하위 구간에 쏠려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표3>.

심평원이 국회 전현희 의원실에 제출한 '의원 진료비 크기 누적 심사실적' 자료에 따르면 미표시 의원 중 최상위 구간에 포함된 기관은 전체 4417곳 가운데 114곳, 전체의 2.6%에 불과했다. 반대로 최하위 구간에 속한 기관은 3065곳으로 미표시 의원 69.7%가 이 구간에 속했다.

이 자료는 2009년 한해 의원급 의료기관에서 발생한 총 요양급여비용을 내림차순으로 해 누적비율에 따라 25%씩 동일한 규모로 4등분 한 뒤 각 구간에 포함된 의료기관의 수를 적시한 것. 각 구간별로 진료비는 총 요양급여비용의 4분의 1로 같지만 상위구간의 경우 진료비 금액이 큰 소수의 기관들이, 최하위 구간의 경우 진료비 금액이 상대적으로 적은 다수의 기관들이 속해 그 금액을 맞추게 된다.

최하위 구간에 속한 의료기관의 비율이 높다는 것은 해당 과목에 상대적으로 진료비 규모가 적은 기관이 몰려 있다는 의미다.

박노준 대한산부인과의사회장은 "울며 겨자먹기로 전문과목 표방을 포기해도 완전한 대안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라면서 "미용이나 비만관리 등 다른 분야로 진료영역을 확장하더라도 워낙 시장경쟁이 치열해 살아남기가 힘들다"고 전했다.

시급한 정책 개입 필요하다

개원시장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 한 전문과 미표시 의원은 어쩔 수 없는 대안 중의 하나로, 앞으로도 지속적인 증가세를 이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대로 이는 하나의 탈출구는 될 수 있어도 시장기능을 정상화하는 실질적인 대안으로 작용할 수는 없다. 의원급 의료기관들의 '정상적인, 혹은 안정적인 경영'이 보장되지 않는 한 미표시를 포함한 진료영역 확대 노력은 계속될 수 밖에 없다.

여기서 주지해야 할 것은 개원시장 왜곡에서 파생된 미표시 의원이, 결국에는 또 다른 혼란과 왜곡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이다. 근본적인 문제해결 없이는 미표시로의 탈출이 또 다른 무한경쟁으로 질주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전문가들은 1차 의료기관의 경영난 해소와 균형발전을 위해 정부가 장기적인 관점에서 실질적인 처방을 내놓아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조성문 외과개원의협회장은 "미표시로의 이탈은 정부의 전문과 균형발전 정책에 실패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지적하면서 "외과 수가를 인상했다지만 실제 개원가에서는 인상효과를 전혀 체감할 수 없다. 1차 의료를 살릴 수 있는 현실적인 지원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조 회장은 병원급 의료기관 고용인력 창출 등을 그 대안으로 내놨다. 그는 "외과수술이 병원급에 집중되고 있는 만큼, 대학병원에서 외과의사를 더 많이 수용해야 한다"면서 "수가 인상으로 대형병원의 수입이 증가된 부분을 전문인력창출 등에 활용하는 방법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산부인과의 경우에는 수가 현실화와 더불어 의료사고에 대한 대책마련 등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박노준 산부인과의사회장은 "현재의 수가로는 산부인과 의원을 계속해서 경영해 나갈 수 없는 상태"라면서 "분만수가와 더불어 분만을 하지 않는 의원에 대해서도 수가 인상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박 회장은 "의료사고의 위험 또한 산부인과 개원가의 큰 걸림돌"이라면서 "무과실보상기금을 포함하는 의료사고법 제정을 조속히 마무리 해야 하며, 앞으로도 지속적인 관심과 제도개선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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