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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 학문과의 동거를 꿈꾸며…
타 학문과의 동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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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12.31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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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을 볼 것인가? '사람'을 볼 것인가?

▲ 임정택(연세대 교수·독문학미디어아트연구소장)
의사도 호모 이마기난스가 돼야

"투자 상상력으로 투자를 디자인하라", "상상력을 만족시키는 아이언샷".

요즈음 각종 매체에 자주 나오는 광고카피들이다. 금융투자도 골프클럽도 모두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모 기업의 신입사원 채용광고는 아예 세상을 바꿀 상상력으로 가득 찬 젊은 인재를 뽑는다고 선언하는가 하면, 자동차의 신모델이 상상력의 결집물이라는 것을 내세우기도 한다.

시대를 가장 앞서가는 매체인 광고가 이렇게 상상력을 키워드로 내세우고 있는 것을 보면 과연 상상력의 시대가 오고 있음을 절감할 수 있다. 얼마 후에는 병원에서 또는 의료산업계에서 상상력이 풍부한 의사를 모집한다는 광고가 등장할 지도 모를 일이다.

왜 21세기에는 상상력이 화두가 되고 있는 것일까? 상상력이 이제 문학과 예술의 전유물이 아니라 과학기술·경영·산업·교육·의료 등 모든 분야로 확산되고 있는 배경은 무엇일까? 거시적으로 볼 때 그것은 상상력과 테크놀로지의 관계가 변했기 때문이다.

인류 문명사는 두 개의 수레바퀴로 굴러왔다. 앞바퀴는 상상력이고 뒷바퀴는 테크놀로지이다. 인간은 먼저 상상을 했고 후에 상상을 구현하기 위해 기술을 발전시켰다. 이 두 개의 바퀴를 축으로 하여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인류 문명이 전개되어온 것이다.

인류 문명의 초기에 상상력과 테크놀로지는 욕망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너무 배가 고파서 모든 것이 사탕으로 되어 있는 유토피아 공간을 상상했다. 그 상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도구를 발명하여 자연을 정복하면서 인간은 배고픔을 극복하고 문명을 이룩했다.

그런데 인간이 이성을 도구로 하여 자연을 정복하기 시작하고, 과학기술 중심의 문명을 이루게 되면서, 상상력과 테크놀로지라는 두 개의 바퀴는 점점 멀어져서 서로 다른 반대 방향으로 굴러가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는 호모 파버(도구적 인간)는 들었어도 호모 이마기난스(상상하는 인간)는 듣지 못했다.

우리는 오래 동안 인간의 본질이 상상이라는 것을 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20세기 후반 디지털 문명시대를 맞이하기 시작하면서, 상상력과 테크놀로지는 다시 만나고 있다. 최첨단 기술들이 우리 인간의 상상력을 빠른 속도로 실현시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컴퓨터를 기반으로 하는 디지털테크놀로지는 인간이 꿈꾸는 모든 것을 즉각적으로 구현시켜주기 때문에 상상력이 곧 테크놀로지인 새로운 문명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호모 이마기난스가 복권되는 상상력의 시대가 온 것이다.

근(현)대적 시각으로 볼 때 상상력의 축에 인간·감성·소프트웨어·따뜻함·자연·아날로그·예술 등의 키워드들이 속한다면, 테크놀로지의 축에는 기계·이성·하드웨어·차가움·문명·디지털·과학 등의 키워드들이 속한다.

그런데, 두 개의 큰 축이 수렴됨으로써, 이렇듯 상반된다고 생각한 키워드들이 서로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융합이라고 하는 세계정신은 바로 이런 두 축의 수렴으로부터 나온 현상이다. 앞으로의 미래사회는 이질적인 것이 네트워킹될 수밖에 없는 방향으로 나갈 것이 분명하다.

이성과 감성이, 기계와 인간이, 자연과 문명이, 차가움과 따뜻함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과학과 예술이 만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정신에서 의학도 그 예외가 될 수 없다.

아직도 생물학적 지식에 함몰되어 있는 의학이 인간 중심의 의학으로 탈바꿈하는 것, 암기 위주의 고정된 주입식 의학교육이 프로젝트 중심의 창의적 교육으로 전환되는 것, 질병 중심의 기계적인 진료가 인간으로서의 환자 중심의 진료로 바뀌는 것, 이것이 바로 의학적 상상력이다.

이를 위하여 의학은 문학·철학·역사 등의 인문학, 나아가 경영학·공학 등 타 학문과의 공생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상상력은 의학이 미래를 향하여 진화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다. 이런 맥락과 함께 의사는 전문기술을 넘어 통합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호모 이마기난스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의학과 상상력이 만나…

우리가 의학과 상상력을 논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이다. 인간의 몸 안을 들여다보고 싶은 욕망은 X-Ray·CT·fMRI 등 첨단 의료기술을 발전시키고 인간의 몸에 대한 상상력을 구현한다. 인간의 마음을 영상이미지로 시각화하는 것 자체가 상상력이다.

로봇이 의사와 함께 전립선 제거 수술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상상력이다. 나노로봇이 혈관을 통해 이동하면서 각종 데이터를 전송하는 것은 이미 영화 속의 상상력을 넘어 현실이 되고 있다. 의학은 이미 상상력을 실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기계에 기반한 '테크노상상력'이다. 현대 의학의 기계에 대한 의존도는 날로 높아갈 것이다. 인간으로서 의사가 해야 할 일의 상당부분을 기계가 대신해 갈 것이다. 반면에 인간 의사로서의 상상력과 인간 환자에 대한 상상력은 점점 더 퇴화해 갈 것이라는 우려가 지배적이다.

사실 한국 의료계에서 의사와 기계가 닮아가고 있으며, 의과대학의 교육스타일이 기계적이라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다. 한국의 의학은 아직도 상상력이 억압되는 환경에 처해있는 것이다.

인간적 상상력과 기계적 상상력의 불균형은 날로 심화되어가고 있다. 이것은 의학이 근·현대의 학문들처럼 계속된 분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너무 전문화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의학의 새로운 미래를 열기 위해서는 호모 이마기난스의 복권이 시급하다. 의사는 상상하는 인간이어야 한다.

무한정 생산되고 축적된 과학지식에 함몰되어 환자-인간을 보지 못하고 병만을 보는 의사는 상상력이 결핍된 의사이다. 상상력이 결여된 지식 자체는 한갓 죽어있는 데이터에 불과하다. 데이터만으로 병을 치료하는 것은 불완전한 것이다.

▲ 21세기에 상상력은 더 이상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능력이기 보다는 무한정 쏟아지는 지식정보들을 새롭게 조직하여 디자인하는 능력이다.

상상력으로 데이터에 혼을 불어넣을 때, 그 지식은 진정으로 쓸모 있는 지식이 될 것이다.

21세기에 상상력은 더 이상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능력이기 보다는 무한정 쏟아지는 지식정보들을 새롭게 조직하여 디자인하는 능력이다. 호모 이마기난스로서의 의사는 환자의 병으로부터 환자 개인·가족·사회에 대한 스토리를 엮어내는 이야기꾼이어야 한다.

스토리를 통해서 의사는 환자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그에 상응하는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개발해야 한다. 진정한 의사는 환자의 삶 전체와 그가 서있는 사회에 동참하는 라이프컨설턴트여야 한다. 이것이 모두 의학적 상상력의 함의들이다. 미래의 의학은 지식기반 의료에서 상상력과 창의력 기반 의료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가져올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통해서 인간적 상상력과 기계적 상상력의 균형을 이룸으로써 의사와 환자의 진정한 인간적 교류를 보장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의학이 상상력과 만나야 하며 타학문과 공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새로운 의학의 미래를 열다

2009년 9월에 오스트리아 린츠에서 개최된 전자예술 전시회 Ars Electronica에서, 유전자 조작을 통해서 형광토끼를 만든 에두아르도 칵이 이번에는 본인의 DNA를 이식시킨 화초를 개발하여 바이오아트 분야 대상을 받았다. 이것이 현 시대의 융합적 상상력의 전형적 예이다.

전혀 이질적인 것의 조합을 통하여 새로움을 창출하는 것, 이것이 21세기 상상력의 주된 개념이다. 의학이 미래를 열기 위해서는 자신의 문을 과감히 열고 타 학문 분야들, 즉 인문학·예술·미디어학·경영학·공학과의 네트워킹을 과감히 시도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의학교육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의학이 의학 내부의 세분화를 극복하고 의학 내부와 외부로의 네트워킹을 강화시킬 때 미래 의학의 길이 열릴 것이다.

필자는 수년 전 의과대학에서 '의료와 문화콘텐츠'라는 강의를 시도한 적이 있다. 의과대학에서 습득한 의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인간을 즐겁게 하고 건강하게 할 수 있는 미래형 문화콘텐츠를 기획해보는 소위 프로젝트형 강의였다.

수업 방식도 필자가 늘 즐겨하는 것처럼 학생들을 조별로 편성하여 구체적인 주제를 주고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하였다. 그야말로 학생들이 의학적 지식을 넘어 상상력을 펼쳐보도록 하는 환경을 조성해주었다. 필자는 학생들로부터 두 가지 상반된 경향들을 감지할 수 있었다.

하나는 현재의 의학교육시스템과는 너무나 이질적인 수업방식과 수업내용 때문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부담을 느끼는 부류와 다른 하나는 상상력이 억압되고 있는 의학교육으로부터 엄청난 해방감을 느끼는 부류였다. 필자는 이 강의를 통해서 의학적 상상력의 가능성을 확인하였다. 의과대학 학생들이 대부분 의사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그 중에서 때로는 철학자·사학자·윤리학자·기업의 CEO·문화산업계의 리더·공학자·디자이너 등 돌연변이들도 배출될 수 있어야 한다. 미래의 의학교육은 상상하는 인간으로서의 의사를 양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문학자로서, 문화콘텐츠 기획자로서 상상력을 업으로 삼고 있는 필자는 다시 의과대학 강단에 설 날을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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