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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가짜 법정장애라는 전염병

시론 가짜 법정장애라는 전염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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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11.20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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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석(순천향의대 교수·천안병원 신경외과·대한의학회 정책 장애평가 이사)

지난 봄 연두 빛으로 싱싱하게 싹을 틔웠던 은행잎이 초록물이 뚝뚝 떨어질 듯 짙은 여름을 지나 이제 개나리꽃처럼 노랗게 바뀌었다. 내 눈에 비친 바깥세상만 변한 게 아니라 연두 빛 은행잎을 보던 나와 노란 은행잎을 보는 나도 같은 내가 아니다.

세상을 보는 나도 바뀌는 세상에 바뀌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러니 장애에 대한 생각도 바뀌지 않을 수가 없는데, 가끔 바뀐 세상이 나를 놀라게 하기도 한다.

질병이나 장애를 신의 저주나 징벌로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신의 저주나 징벌까지는 아니더라도 좋은 게 아니니 버리거나 없애는 것을 당연시하기도 했다. 중세시대에는 종교단체에서 일부 장애인들에게 자선을 베풀기도 했지만, 장애에 대한 무시와 학대가 나아진 것은 근대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하지만 20세기 초반까지도 장애인은 동정의 대상이었고 복지는 자선이었다. 장애인복지를 평등한 인간의 권리로 보게 된 것은 20세기 후반에 와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동안 무시당했던 권리를 이제야 겨우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이 권리를 잘 보호하고 보장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21세기 한국에서는 이 권리가 심하게 오염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장애는 걸림돌이었고 특히 집안에 장애인이 있으면 혼인길이 막힌다고 감추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장애인복지정책이 국가 차원에서 추진되기 시작한 것은 1981년 심신장애자복지법이 제정되면서부터라고 한다.

그리고 1988년부터 법으로 정한 소위 법정장애인을 등록하기 시작했는데, 초기에는 장애를 감추려는 사람들이 많아서 의사나 공무원에게 미리 장애인을 등급별로 할당해서 강제로 등록하도록 했다고 한다.

그러던 장애인등록이 급증한 것은 1997년부터 법정장애인들한테 실질적인 경제적 이익을 제공하면서부터이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 등록 장애인 수가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법정장애인이 가파르게 증가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1989년에는 지체장애·시각장애·청각장애·언어장애·정신지체장애 등 다섯 가지 장애 유형만이 법적 장애인으로 인정되었으나, 1998년에 '장애인복지발전 5개년계획'이 수립되면서 1999년에 1단계 장애 범주 확대를 통해 뇌병변장애·신장장애·심장장애·정신장애·발달장애(자폐증)가 추가되었다.

2003년에 다시 2단계 장애 범주 확대가 이루어져 호흡기장애·간질환장애·장루 및 요루 장애·중증 간질장애·안면기형 등의 장애가 추가되게 됐다. 이처럼 장애범주가 5개 유형에서 15개 유형으로 확대되면서 장애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장애인들의 권리의식이 커지면서 장애인 등록이 급증했다.

그리고 생겨서는 안 되는 현상이지만, 장애인들에게 주어지는 경제적 이익을 훔치는 파렴치한 족속들의 증가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장애인의 권리는 당연히 보장돼야 한다. 그러나 파렴치한들이 장애인의 권리를 훔쳐가는 것은 바로잡아야 한다. 원칙은 당연한 데 현실은 그렇지 못해서 장애수당을 받는 중증장애인의 약 1/3이 등급을 부풀려서 부당하게 나랏돈을 훔쳤다고 한다.

세 명 중 한 명이 불법일 정도면 어쩌다 한두 명이 아니라 너나 나나 다 하는 수준이다. 빠른 성장에 따른 원하지 않는 부작용일 수 있지만, 법정장애라고 하는 전염성이 매우 높은 질병이 21세기 대한민국에 창궐했음을 뜻한다.

선도 보기 전에 결혼 날짜부터 잡는 식으로 조급하게 밀어붙이는 나쁜 버릇이 장애인 복지정책에서도 그대로 나타난 것인데, 훔쳐가기 좋은 물건들을 아무도 지키지 않는 곳에 쌓아놓고 제대로 관리되길 바라는 건 국민들을 도둑으로 만들거나 바보로 만드는 일이다.

장애여부나 정도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도구를 제대로 만들지 않았고, 장애를 판정하는 요령을 교육한 적도 없이 얇은 지침서 하나로 장애평가를 하도록 했으니 가짜 법정장애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깨끗한 옷을 입은 사람들 속에 어쩌다 더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 섞이면, 더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위축되기 마련이나, 여기 저기 더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이 많이 보이면 보일수록 더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이 활개를 치기도 한다.

부당하게 장애인의 권리를 훔친 사람들은 제발 부끄러운 줄이나 알고 나서지나 말아야 하는데 못된 송아지가 엉덩이에 뿔나듯 불법행위를 자랑하고 그 자랑을 들은 다른 사람은 파렴치한 행위가 마치 능력이라도 되는 양 흉내를 낸다.

드디어 불법행위는 전염병이 되어 연못물이 통째로 흐려져 썩은 냄새가 널리 퍼지니, 이제 장애인들이 가짜 장애인을 색출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하고 부당하게 나랏돈을 훔치는 사람들을 처벌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장애인에게 가야 할 곡식을 몰래 빼먹는 쥐들이 곳곳에 넘쳐나고 있다. 선진국에 비해 뒤늦게 작은 예산으로 장애인 복지를 시작했는데 제대로 틀이 잡히기 전에 쥐들이 싹을 갉아먹고 있다.

어떤 분은 영양실조 상태에서 비만부터 걱정한다고 복지예산부터 더 늘려야한다고 주장하시는 분도 있지만, 싹부터 갉아먹는 쥐들을 잡지 않는 한 복지 예산을 더 늘려 봐야 게걸스러운 쥐들만 폭발적으로 늘어날 뿐 싹이 잘린 장애인 복지가 꽃을 피울 수는 없다.

늦었지만 대한의학회에서는 2007년부터 전문가들이 모여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새로운 장애평가기준을 만들고 있다. 이제 곧 새로운 기준이 확정될 것이다. 이 기준은 말하자면 새로 생긴 가짜 법정장애라는 전염병을 다스릴 수 있는 특효약이 될 것이다.

의사들은 이 새로운 전염병을 다스릴 특효약에 대해서도 공부를 해야 하며, 신종 전염병이 널리 확산되지 않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

한편, 장애인의 권리를 훔쳐 먹던 파렴치한 족속들에게는 새로운 평가기준이 쥐약이 될 것이다. 세상이 바뀌면 바뀐 세상에 맞춰 사는 사람도 있지만, 죽어도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부류도 있다.

그렇게 발악을 하는 쥐들은 마치 정부가 복지비용을 줄이기 위해 장애평가기준을 강화하는 것처럼 선동해서 새로운 기준을 버리도록 공작을 할 가능성도 있다. 물론 쥐약이 아무리 발달해도 살아남는 쥐는 꼭 있기 마련이지만, 21세기의 의사는 병공부만 해서는 안 되고, 쥐 잡는 법도 알아야 한다.

세상이 끝없이 바뀌어 신의 저주였던 장애가 돈줄이 되는 세상은 나를 놀라게 한다. 하지만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적어도 내가 사는 동안에 쥐를 가축으로 생각해야 할 정도로 세상이 바뀔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외쳐 본다. 한때 유행했던 게임처럼 "쥐를 잡자! 쥐를 잡자! 쥐! 쥐! 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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