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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생 트라우마와 분노하는 의사들

모범생 트라우마와 분노하는 의사들

  • Doctorsnews kmatimes@kma.org
  • 승인 2009.11.06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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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훈정(대한의사협회 공보이사 겸 대변인)

정신과 전문의 김준기선생님의 저서 '영화로 만나는 치유의 심리학'을 보면 '착한 아이 트라우마'라는 재미있는 표현이 나온다.

부모의 무관심이나 무시, 방치로 아이에게 적절한 정서 반응을 보이지 않고 또 필요한 보살핌과 보호를 제공하지 않으면 꼭 있어야 하는 것이 없는 상태, 즉 보이지 않는 트라우마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아이가 스스로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제공해야 하는데, 겉보기에는 애답지 않게 알아서 잘 하는 착한 아이로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스스로를 달래기 위해 필사적으로 에너지를 소모하기 때문에 인격의 균형적인 발달을 이루기 어렵다고 한다.

흔히 이런 아이들을 둔 부모들은 '우리 아이는 있는 듯 없는 듯 키웠다', '어려서부터 투정 하나 안 부리고 스스로 알아서 다 했다'라고 자랑하지만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아이 스스로 자신을 달래면서 숱한 어려움들을 극복하고 자라는 것이 어린아이의 능력으로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그러한 과정에서 아이가 상처를 입고 또 부모의 적절한 관심과 도움이 없이 고통을 겪어야 한다면 절박한 무기력감 속에서 굴복을 하거나 현실 회피, 충동적인 공격성, 수치심과 자기 비하 등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는 결국 방임이며 다른 형태의 학대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착한 아이 트라우마를 '모범생 트라우마'로 발전시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 의사들은 대부분 학창 시절에 모범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모범생'이라는 타이틀이 얼마나 힘들게 얻고 또 유지해야 하는 것인지 모른다. 항상 남보다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하고 다른 학생들의 모범이 되어야 하며 때로 부당한 대우를 받더라도 반항하기는커녕 묵묵히 참고 견뎌야만 이른바 '모범생'이라고 불릴 수 있다.

그런데 그 과정 속에서 속은 시커멓게 썩어 들어간다. 그러다 인내의 역치를 넘어서게 되면 부당한 처사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기보다는 옥상 위에서 뛰어내리거나 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곤 한다.

지난 세월동안 의사들은 정부와 사회로부터 끊임없이 '모범생'으로서 처신하기를 요구 받았다. '의사는 인술을 펼쳐야해.', '잘 버는 의사가 좀 손해 봐야지.', '의사가 어떻게 집단행동을 하나.' 선천적으로 모범생일 수밖에 없는 의사들은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배웠다는 이유로 참고 또 참았다.

그러나 이젠 더 타들어갈 속이 남지 않은 의사들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지금은 남들보다 더 잘 버는 직업도 아니고 사회적으로도 그다지 존경을 받고 있지 못한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참고 손해보고 견디기를 요구하는 정부와 사회를 향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금 신종플루로 온 국민의 생명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의사들은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일선 진료현장에서 애쓰고 있다. 그런데 정부는 의사들에게 따뜻한 격려는커녕 처방을 잘못하면 삭감이나 처벌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원가의 70%에도 못 미치는 수가에 경영난으로 허덕이는 의사들에게 정당한 보상을 해주기는커녕 건강보험공단과 가입자 대표들은 수가 협상이 결렬되었다고 패널티를 물려야 한다며 겁박을 한다. 이것이 제대로 된 의료제도이며 의사에 대한 대접인가.

우리는 모범생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야 한다. 부당한 대우에는 더 이상 참거나 피하지만 말고 당당히 맞서 싸워야 한다. '착한 아이'가 사실은 부모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학대 아동'이듯이 '모범생' 역시 끊임없는 폭력에 노출되고 희생을 강요받는 '왕따 학생'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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