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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실의 해결사

진료실의 해결사

  • Doctorsnews kmatimes@kma.org
  • 승인 2009.11.03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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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희(부산의사문우회장)

달이 바뀐 이른 아침은 새해 아침처럼 새롭다. 달력을 한 장 넘기면 그림에서 인쇄향이 묻어난다. 바뀐 그림을 보면 다짐도 새로워지고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긍정적인 기분이 든다. 지난달에 하지 못한 일을 이번 달에는 마무리를 지어야지, 각오도 달라진다. 오늘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요즘은 환절기라 감기 환자가 대부분이다. 심한 일교차 때문이기도 하지만 봄이 되면 나른해지는 신체적인 이완으로 저항력의 저하가 원인 일 수 있다.

이맘때면 항상 나타나는 훈이가 올해도 약속이나 한 듯 며칠째 진료실을 찾는다. 황사 바람이라도 부는 날씨가 계속되면 아이의 고생은 더 심해진다. 계절이 바뀌면 알레르기 질환으로 고생하는, 소위 '감기를 달고 사는 아이'이다.

정상적인 성장 발육이라는 게 참 중요하다. 하루가 다르게 행동이 달라지는 게 신기하고 흐뭇하다. 훈이가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고부터는 어린 아이티를 벗어 제법 의젓하고 생각도 깊다. 오늘도 연신 콧물을 훌쩍거리며 어머니와 함께 나타났다.

무얼 먹고 있는지 작은 입을 연방 오물거리며 종이에 싼 걸 손에 들고 의자에 앉는다.

"훈이야, 이번 감기가 좀 오래 가는 것 같다"며 말을 부쳐보나 들은 척도 않는다.

"선생님, 이것…"하며 손에 들고 있는 걸 책상위에 올려놓는다.

붕어빵이다. 병원 오는 길에 어머니를 졸라 샀나보다. 가기 싫은 병원에 오는 조건으로 빵을 사준 것 같다. 모자간에 성사된 대단한 빅딜이다. 두 개를 사서 하나는 오면서 계속 먹고 있고, 하나는 어머니 대신 나 줄려고 갖고 왔단다. 아주 감동적인 인정이다.

학교에서 얼마나 장난을 쳤는지 빵을 든 손바닥은 시커먼 흙이 묻어 있고, 콧물을 훔친 손등이 비닐 종이처럼 빤질거린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갓 구은 붕어빵이 먹음직스럽기는 하다. 솔직히 주는 정성은 고마우나 그걸 얼른 받아먹기에는 좀 그렇다.

옆에 있는 어머니는 싱긋이 웃으면서 훈이의 제안에 대한 나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다. 훈이는 맛있다고 어서 먹어 라고 조른다. 두 모자는 붕어빵과 내 입을 동시에 쳐다보고 있다.

훈이는 붕어빵을 삼킨 내 입에서 "참, 맛이 있다"는 말을 기대 할 것이고, 어머니는 과연 먹을 것인가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 먹자니 그렇고 안 먹자니 훈이가 섭섭할 것 같다. 말없이 바라보는 어머니의 시선도 부담스럽다.

오늘 아침 기분으로는 분명히 낮에 운수가 괜찮을 것 같았는데, 이 무슨 곤욕이람.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쓴 약 먹는 셈 치고 먹어볼까. 빵을 집어 들었다. 말랑말랑하고 따뜻한 감촉이 그런대로 괜찮다. 막 입에 넣으려는데 누군가 진료실 문을 차는 것이다. 성질 급하고 산만한 만강이가 석양의 무법자처럼 나타난 것이다.

몇 년째 유치원을 재수하고 있는 이 녀석은 리스트에 올려 있는 요주의 인물이다. 대기실에서 유리컵을 깨기도 하고, 다른 아이들에게 시비를 걸어 소란을 피우는 건 예사이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집중력이 없다. 외부의 자극에 항상 예민한 반응을 보이며 부잡스럽다. 통제가 잘 안되어 다루기가 힘든 아이이다.

가끔 이상한 질문을 하여 주위를 어리둥절하게 할 때도 있다. 남의 말에 잘 끼어들고 하고 싶은 말을 참지 못하고 엉뚱한 데가 있다. 주위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밀어 붙인다. 또래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기 일수 이다. 정신없이 설치고 산만 한 게 주의력결핍 과잉운동장애 아이이다. 아마도 집에서 과보호적인 양육에 문제가 있었던가 보다.

이런 만강이가 진료실문을 차고 들어오는 날이면 오기 싫은 병원에 억지로 끌려서 온 기분이 상한 날이다. 이때는 예외 없이 진찰 중 내 무릎도 걷어찬다. 아이들이 의사 무섭게 생각하는 건 옛 이야기이다. 그래도 가끔 하는 행동이 너무 순진해 마음이 끌릴 때도 있다.

부모의 눈에는 약간 심한 평범한 개구쟁이로 보이겠지만 참을성이 없는 영락없는 사고뭉치이다. 자신을 적절하게 조절하는 능력이 부족하여 항상 문제를 일으킨다. 학원에서도, 유치원에서도 그렇고 병원에 와서도 예외는 아니다. 세 번 오면 꼭 한번 정도는 사고를 치고 가는 녀석이다.

이런 녀석이 하필이면 내 입장이 곤란한 이때에 진료실에 나타난 것이다. 오늘도 문을 차고 들어오는 징조가 심상치 않다. 벌써 긴장이 된다. 문소리에 놀란 사람은 나만 아니다.

겁을 먹은 훈이도 붕어빵은 잊은 채 어머니 손에 잡혀 진료실을 슬그머니 빠져 나간다. 흥분한 만강이는 할머니 손에 잡힌 채 씩씩거리며 진료실 의자에 앉는다.

"야 만강아, 오랜만이다. 그 동안 점잖아지고, 많이 컸네."

이렇게라도 녀석의 비위를 맞추고 치켜세워야 내가 편하다. 내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눈은 이미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붕어빵에 쏠려 있다.

"선생님, 이것 뭔데?"

이 녀석이 빵인 줄 몰라서 묻겠는가. 이건 바로 '나 안 줄래'라는 말이다. 벌써 침을 삼키는 표정이 안 주면 사고라도 칠 태세다. 이왕 줄 거면 나도 조건을 하나 제시해야지.

"오늘 내 말 잘 들으면 맛있는 이 빵을 줄 거고, 안 들으면 내가 먹을 거야."

"예"하며 금방 순한 양이 된다.

먹이 앞에는 누구나 고분고분하다. 선심도 쓰고 난처했던 내 입장도 절로 풀렸다. 일거양득이다. 이 녀석이 나에게 이런 도움을 줄 때가 있나. 진료실의 사고뭉치가 내 고민 하나를 시원하게 해결해 주었다.

오늘은 역시 운수가 좋은 날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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