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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24-04-25 14:25 (목)
95세 할머니의 따뜻한 손

95세 할머니의 따뜻한 손

  • Doctorsnews kmatimes@kma.org
  • 승인 2009.10.23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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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주현(대한전공의협의회 부회장 서울보훈병원 안과 R4)
할머니는 항상 미안한 듯이 문을 빼꼼히 열고 "선생님, 안녕하셨어요" 인사하며 진료실로 들어오신다. 구부정한 허리, 좁은 어깨, 영락없는 우리네 할머니 모습 그대로지만, 목소리 하나만큼은 대단히 씩씩(?)하셔서 주변을 밝게 해줄 정도다.

할머니는 만성 녹내장을 앓고 계시다. 세 종류나 되는 치료 안약을 하루에 두 차례 혹은 한 차례씩 순서대로 번갈아 넣는 것은 젊은이들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하루는 할머니께 조심스럽게 연세를 여쭤봤더니, "내가 93세로 되어 있는데, 호적이 잘못 되서 그렇지 실제는 두 살 더 많아~" 하셨다. 아 95세. 말이 쉽지 그야말로 한 세기를 살아오신 분이셨다.

지난 백년이 또 어디 그리 쉬운 날들이었을까.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근현대를 온몸으로 살아오셨을 게다. 겹겹이 쌓인 이마의 주름살과 세월을 오롯이 보여 주는 손등으로 그 어려움을 어림짐작할 뿐이다.

"안약 넣어주실 가족 분은 계셔요?", "아니, 자식들은 다 이민 가고 나 혼자 살아." "그럼 병원에 어떻게 오세요?", "버스타고 지하철 갈아타고 오지~." 왜 이럴 때 눈물이 핑 도는 걸까? 도통 잘 모르겠다. 할머니는 국가 유공자이시다.

기미독립운동도 소싯적에 직접 보았다고 하시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오기 위해 노력하셨단다. 어쩌면 이렇게 편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도 그 덕분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연세가 드시고 몸은 이렇게 저렇게 불편해질 때 이제 그 어려움을 혼자서 겪어내고 있으시단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그저 할머니의 손 한번 꼭 잡아보는 것뿐이다. 까칠해진 손이지만 여전히 따스하다. 해드릴 수 있는 일이 별게 없다는 자괴감을 느끼기엔 그저 너무 철이 들어버렸다.

요즘 원격 의료 도입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란다. 누가 주도권을 잡느냐, 어느 정도의 환자군이 있느냐, 파이는 과연 커지느냐 등으로 논란인데, 할머니처럼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 또는 소외 지역 주민들에게 원격 의료는 좋은 대안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원격 의료가 모든 진료를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할머니가 진료실로 찾아오지 않으신다면, 나는 할머니의 따뜻한 손을 만져볼 수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손을 통해 할머니의 세월과 할머니의 아픔과 할머니의 건강을 쉽게 느낄 수도 없을 것이다.

모니터를 통해 보는 할머니의 모습으로는 무언가 부족할 것이다.

'그래도 환자를 걱정하는 것은 의사'라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마지막 순간에라도 그러한 자부심을 포기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의료를 일종의 산업 혹은 경제 활동으로 보는 시각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할머니가 오시는 매달 말일이 되면 못내 기다려진다. 정해진 날짜에 오지 않으시면 내심 걱정이 된다. 걱정하는 마음은 단지 할머니의 매력 때문일 수도 있고, 나와 우리들 안에 생긴 어떤 마음가짐 때문일 수도 있다. 의사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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