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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국에서 맞은 6.25…그 아픔을 기억하며

타국에서 맞은 6.25…그 아픔을 기억하며

  • Doctorsnews kmatimes@kma.org
  • 승인 2009.10.09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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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13일 인천국제공항을 떠나, 뉴욕 JFK공항에 도착함으로서 나의 두 번째 이국생활이 시작됐다.

12년 2개월의 효성병원 근무를 마치고 200여명 직원들과의 석별의 정을 뒤로하고 막상 떠나오니 두 번째 미국생활을 향한 기대와 설렘과 함께 한 가닥 불안하고 착잡한 심정이 엇갈렸다.

첫 번째 미국생활은 1969년 7월 K-2공군병원 군의관 생활을 마치고 두번째 인턴생활로 시작했다. 그 후 뉴욕 롱아일랜드에 있는 낫소카운티메디컬센터에서 또한 두번째 산부인과 전문의 과정을 마치고 나서 그 후 위스콘신주 워터타운에서 산부인과를 개원했다.

그러다 자식들이 모두 대학을 마치고 독립하자 1990년 미국생활 21년 만에 고국에 돌아와 연로한 부모님과 함께 하게 됐다. 부모님을 모신지 10년이 지나니 두 분 다 별세하시고 나이가 들어 은퇴하고 나니 자식들 가까이 살고 싶은 본능으로 다시 미국에 오게 됐다.

산부인과 의사로서의 48년 세월에 종지부를 찍고 은퇴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자리를 잡은 곳은 뉴저지주 북부 OLD TAPPAN이라는 인구 약 5500명의 조그마한 도시로서 조용하고 공기 맑고 사람들이 친절해 은퇴한 사람이 살기에 안성맞춤이다. 걸어서 약 8분 거리에 쇼핑몰이 있어 필요한 것은 거의 다 구할 수 있고 한국 식품점은 자동차로 10분 이내 거리에 있다.

한국 사람 입맛에 맞는 음식재료를 왠만한 것은 모두 구할 수 있다. 예를들어 추어탕재료를 찾으면 살아 꿈틀거리는 미꾸라지부터 호박잎까지 없는 것이 없다. 남쪽으로 약 30분 내려가면 한국인 밀집구역, Fort Lee가 있는데 구태여 거기까지 갈 필요가 없다.

여기 와서 놀란 것은 이런 시골 구석에 우리 동포가 몇이나 있겠나 했는데 와보니 뜻밖에도 동양인은 중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한국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 그 이유인 즉, 이곳은 학군이 우수한 지역으로 소문난 곳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고등학교는 최우수학교를 지칭하는 'Blue Ribbon School District'로서 자녀가 있는 한국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 전체 학생의 약 15%가 한국계라고 했다. 또 거기다 미국 청소년들의 가장 골칫거리인 마약문제가 없는 청정지역을 뜻하는 'Drug Free Zone' 팻말이 붙어있다.

집근처에는 걸어서 7분 거리에 Oake Park라는 조그마하고 아담한 공원이 있다. 공원입구에 고풍스런 큰 시계가 우뚝 서 있는데 이 시계에는 이 마을이 1894년에 세워졌다고 새겨져있다.

이 공원은 2002년 조성되었는데 공원 한 가운데 팔각정이 자리 잡고 분수대에서 물이 뿜어 나오며 골프코스를 연상시키는 아담하게 다듬어진 잔디가 고운 산책길이 타원형을 이루어 시민의 산책 겸 운동 코스로 사랑받고 있다.

필자는 가급적 매일 아침 여기 와서 10~12 바퀴 돌며 대략 한 시간 동안 4~5km 거리를 운동하는 셈이다. 이 공원 오른쪽에 네 개의 역대 전쟁 충혼비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이것들은 전사자를 포함한 참전용사들의 명단이 적힌 충혼비들이다.

맨 왼쪽부터 첫 번째 것은 세계 1차대전 (1917~1918)의 24명, 두 번째가 세계 2차대 (1941~1945) 61명, 세 번째가 한국전쟁 (1950~1953) 17명, 네 번째가 베트남전쟁 (1961~1975) 40명 이렇게 각각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지금도 진행 중인 이라크 전쟁과 아프간 전쟁에서 전사한 또는 전사할 군인들의 충혼비가 언젠가 세워질 거라고 생각하니 씁쓸한 마음이 든다. 언제쯤 이 세상에 서로가 조금씩 양보하며 서로를 배려하며 전쟁 없이 더불어 살아가는 평화로운 세상이 오려나 생각하여 본다.

▲ 한국전 참전용사 추모비에 헌화한 꽃다발

지난 6월 25일 아침, 여느 때처럼 아침운동 나갔다가 전쟁용사 추모비 중 하나에 아름다운 꽃이 한아름 꽂힌 꽃병이 놓여 있었다.

바로 한국전 참전용사 추모비 앞이었다. 알고 보니 어떤 한국부인이 우리 한국을 공산침략에서 지키기 위해 전사한 전몰용사와 참전용사들의 추모비에 감사의 뜻으로 헌화한 것이었다. 그 뒤로도 그 꽃이 시들면 새 꽃을 가지고 와서 물도 갈아주며 헌화를 계속하고 있다.

이국 만리 미국 땅에 와서도 그 처참한 한국전쟁을 잊지 않고 또 이 고장 출신 젊은이들이 한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실을 추모하며 오늘도 내일도 꽃을 헌화하며 감사를 잊지 않는 한국 사람들이 이 곳 미국 땅에 있다는 사실이 가슴을 뭉클하게 해준다.

우리 주위를 한번 돌아보자.

우리나라에서 한국전쟁을 기억하고 그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특히 6.25를 겪지 아니한 젊은 세대들이 과연 얼마만큼 6.25를 알고 그 의미를 알고 있는가.

오늘의 교육환경에서 올바른 교육·역사관을 배우지 못하고 크는 젊은 세대들한테서 6.25를 기억하고 6.25의 올바른 인식을 기대하기란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참으로 한심하고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한국전쟁이 터지던 날인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평양 제1중학교 3학년생으로 재학중이었다.

그들이 미리 오래전부터 전쟁을 준비하며 철도와 신작로(국도)를 따라 군인·탱크·대포들을 밤낮으로 남쪽으로 운송해 1950년 6월 25일 새벽을 기해 38선을 넘어 일제 공격을 개시해 평화스런 남한(대한민국)을 침략한 북조선 인민군의 실태를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산증인의 한사람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주위는 어떠한가.

6.25를 겪고 기억하는 세대들은 한 사람, 한 사람 이 세상을 떠나가고 있다. 젊은 세대들은 6.25를 기억 못할 뿐 아니라 5만 여명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바치고 한국을 공산침략에서 구해준 미국을 우리의 주적으로 생각하고 "미군 물러가라"를 외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있으니, 이것이 제정신 가진 사람들이냐.

6.25를 일으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킨 그 정권이 버젓이 아직도 버티고 있어 그 밑에서 어제도 오늘도 또한 내일도 많은 우리 동포들이 굶어 죽었고 또 굶어 죽어가고 고통을 받고 있을뿐더러 이제는 핵무기로 전 인류의 평화와 안녕을 위협하는 그들이 이 세상에 공존하고 있건만 그들의 만행에 대하여는 일언반구 없이 눈 감고 모르는 척 하고 있지 아니한가.

우리 모두가 진지하게 우리주위를 돌아보고 반성해야 한다.

지난날의 역사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과연 어느 길이 우리가 나아가야할 옳은 길인가를 확인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곳 미국 땅, 어느 한적한 곳에 와서 그래도 6.25를 잊지 않고 기억하며 우리 대한민국을 공산침략에서 구하기 위하여 전사한 추모비에 헌화하는 우리 한국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필자의 마음을 위로해 준다.

송문원 / 1936년생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1961년)
대한 산부인과 전문의
미국 산부인과 전문의
전 대구 효성병원 명예병원장
전 대한산부인과학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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